우리나라 성씨는 280여개에 이르고 본관도 4000개를 넘는다. 이 가운데 인구가 10만명을 넘는 성씨·본관은 그리 많지 않다. 그 연원이 오래인 성씨·본관의 인구가 많고, 본관별 지파도 복잡다단하다 하겠다. 의성김씨도 그 대표적인 성씨로 꼽을수 있다. 2000년 통계청의 발표에 의하면 의성 김씨는 전국적으로 총 7만 9368가구에 25만 3309명인 것으로 확인되며, 2015년에 287,469명으로 늘어났다.의성김씨는 김석(金錫)을 시조로 하고 김희달을 영천임고입향조로, 김기상, 김애상 두형제를 영천신녕입향조로 하는 경상북도 영천시 세거 성씨로 문소김씨(聞韶金氏) 또는 내앞김씨로도 일컬어진다. 의성김씨 시조 김 석은 신라 마지막왕인 경순왕 김부(金傅)가 고려에 귀부한 후 고려 태조 왕건의 장녀인 낙랑공주와의 사이에서《의성김씨족보(義城金氏族譜)》에 의하면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다섯째 아들(조선씨족통보, 신라김씨분파연원보)이라는 설이 있지만, 1974년 5월에 간행된 의성김씨 ‘청계공파세적’ 경사류방과 ‘문학공파보’ ‘사직공파보’등에 기록된 넷째 아들이 정설로 되어 있다.그는 왕건의 외손으로 의성군(義城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의성을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고 있다.고려 개국과 함께 문호를 개방한 의성김씨는 김석의 8세손 김공우(金公瑀)의 대에서 크게 번창하였는데, 첫째 아들인 김용비가 태자 첨사를 지냈고, 둘째 아들인 김용필은 수사공을, 막내인 김용주는 평장사를 역임하였다. 의성 김씨 계파는 이들을 중시조로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의성김씨의 종택은 경북 안동에 있고, 의성김씨의 분파는 9세조를 분파조로 하여 5개 파로 나누어진다. 김용비의 후손이 첨사공파, 김용필의 후손이 수사공공파, 김용주의 후손이 충의공파, 김성단의 후손이 찬성공파, 김 흥의 후손이 선략장군공파로 나누어진다. 청계파 직계, 약봉파, 학봉파는 학봉 김성일을 중시조로 하며, 귀봉파, 운암파, 남악파, 문절공파(매말파), 불구당파, 문경공파는 모재 김안국(金安國)을 중시조로 한다. 그 후 20세 이 후 280여 파종으로 늘어났다.의성김씨는 김 석이 성관을 연 이후, 고려와 조선조에 이어 수많은 인물을 배출하며 명문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려와 조선조에 걸쳐 군(君)으로 책봉된 사람이 의성군 김 석을 비롯하여 김홍술, 김용비, 김용필, 김 굉, 김영열, 김광부 등 7명이나 되고, 시호를 받은 사람도 충의공 용주 외에 용소공 영열(英烈), 문원공 원(源) 등 13명이 받았고, 공신, 청백리, 절의 등이 많이 배출되었다. 의성김씨 걸출한 인물로 조선 전기 학자 대제학으로 시호를 받은 문경공 김안국, 성리학자로 기묘사화에 연루 되어 화를 당한 형조참판 김정국, 외교관이며 학자인 경상도관찰사 문충공 김성일, 대학자로 대사헌인 김우옹, 조선 말기 유학자 김흥락, 반일투쟁의 선봉에 섰던 학자로 이승만 정권 독재 반대 투쟁에 앞장섰으며 성균관대학교를 창립한 김창숙 등이 있다. 조선조에 96명이 문과에 급제하였으며, 7명의 봉군이 배출되었다. 높은 관직에 있었던 사람은 많지 않지만 이퇴계의 학문 계승자, 영남 유림의 학맥을 잇는 대표적인 영남학파로 학봉 김성일 선생 이후 학문에 전념한 인물들이 많아서 학문을 우선으로 하는 선비 집안임을 알 수 있다.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서 의성김씨를 빼면 이야기가 안 될 정도로 걸출한 독립운동가를 어느 문중보다 많이 배출된 명문세족임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의성김씨 한 문중에서만 독립운동 유공자가 85명이나 배출되었다 하니 답으로 충분할 것이다. 김용비(金龍庇)는 경북 의성지역의 입향조로 고려 말 공민왕 때 홍건적이 쳐들어 와 안동을 임시 수도로 정하고 몽진했을 무렵 의성 일원에서 활약한 도적의 무리를 다스려 소란한 민심한 공으로 추절 보절공신 의성군(義城君)에 책봉되었으며, 금자 광록대부 태자 첨사를 지냈으며 의성군에 책봉되면서, 후손들이 그를 의성 김씨의 중시조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김용비의 맏아들 김 의의 자손들인 복사공파는 13세 김거두, 김거익의 대에 안동·부여·영일의 청하·청원의 문의 등지로 가서 자리 잡았고, 다시 15세 김 진·김 원의 대부터 3대에 걸쳐 군위·수원·고창의 흥덕· 청양의 정산· 김해· 보령의 감포· 영천의 두협 등지로 산거해 갔다. 그중에서 성주(星州)로부터 장동(章洞)[현 영천시 임고면 금대리]으로 이주한 김희달(金希達)은 영천 임고 입향조이며 그의 후손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재물을 털어 의병을 일으켜 충절과 절의로 나라를 지킨 가선대부 김득추장군과 종질인 김자평, 백암김응택(金應澤)등이 있다. 또한 영일군 청하에서 영천으로 이거한 김기상, 김애상 형제는 의성김씨 영천신녕입향조이며, 12세(世)인 예빈경 김인회를 파조로 하는 예빈경공파이다. 고조는 참봉 김처원이며, 증조는 수직 통정대부 김세명, 조부는 진사 김계원이다. 부친은 김순부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아우 김애상과 더불어 난을 피해 병든 모친 곽씨를 등에 업고 이르른 곳이 신녕다네촌 이었으며 화남면 신호리로 피난하여 살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어머니를 봉양하였다. 임란에 의병으로 참전하고 인간행동의 백행지본인 효를 최고의 본으로 삼았던 의성 김씨 영천신녕입향조 김기상, 김애상 두형제를 추모하기 위해 화남면 신호리에 후손들과 유림이 세운 용호서당의 경효사에서 제향되고 있으며, 그 후세들이 북안면 유상동, 임고면 사동, 화북면 신호동등에 집성촌을 이루고 현재까지 세거하면서 영천에서 성리학의 정신을 실천하고 정·재계 교육 언론계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나타내며 명문가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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