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내가 이 편지를 주운 것이 아니라 친구가 주웠어요. 난 다만 만원에 편지를 가질 수 있었고, 주인으로서 권리를 찾기 위해 오빠를 따라 붙었죠. 끝까지 지켜보자는 내 호기심을 데리고 다니느라 혼났어요.”웃지 않을 수 없었다. 고등학교 삼학년, 대학교 사학년으로서 압박감을, 결코 느낄 수 없다는 동질감으로 그 후로 몇 번 만났다. 은영이의 가족은 이민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미 모든 수속이 끝나 한 달 뒤 독일의 아헨으로 떠나기로 되어 있었다.아헨에서 지렁이를 잡아서라도 정착한다는 것이다. 그런 각오로 이땅에서 발붙이면 충분히 살 수 있을 건데 굳이 이민을 가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물론 은영이는 결정권이 없었다. 새로운 땅에 뿌리를 내려 또 다른 자신을 만나보고 싶다는 것이 은영이 아버지가 이 땅을 등지는 이유였다. 아헨 고등학교까지 정해져 은영이의 선택과는 이미 무관하였다. 그리고 반대하지 않는 이유는 수십 명의 수재들과 경쟁에서 살아남아야만 들어갈 수 있는 일류 대학을 다닐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결코 망설임 없이 털어놓는, 솔직담백한 은영이는 정말 한달 뒤 노스웨스트 항공편으로 떠나갔다.
그 뿐. 별 다른 의미는 없었다. 굳이 은영이에게서 의미를 찾는다면, 극장에서 손을 잡고 영화를 보면서 강렬하게 느껴지는 섹스에 대한 유혹이었다. 간간히 팔꿈치쯤으로 전달 되어지는 젖가슴과, 아침에 일어나서 샤워를 하고 온 몸에 화장품을 엷게 바른다는 그 말에 정신이 아찔해지곤 했다. 그러나 도덕적인 면에서 그녀를 지켜주고 싶었다. 낯선 이국땅에서 뿌리를 내리기 위하여 자신의 인생을 조랑말에 싣고 떠나가는 여자에게 이 땅의 한 남자가 줄 수 있는 것은 빛보다 고운 순결이었는지 모른다. 떠나기 전날 밤,그녀는 깊은 입맞춤을 내게 선물하였다. 나는 보랏빛 만년필을 주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어 만났을 때 그런 시간이 우리에게 주어진다면 은영이의 팥 빛 자궁을 틀림없이 확인하겠다고 했다. 은영이는 파하하하 웃었다. 이미 그녀는 조국을 떠나 독일 땅에 정착한 것처럼 한국 남자 멋있어, 하는 표현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오년 후 솜털이 보송보송했던 허물을 벗고 완전히 탈바꿈하여 이젠 어엿한 여인으로서의 은영이가 앉아 있었다.“언제 왔어? 독일은 어떡하구.” “그것보다도 결혼했어요?”“아직.” “잘 됐네. 애인은?““후후, 없어”“더욱 잘 됐네.”마치 나는 칭찬받을 일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거렸다.“그때 한 약속, 아직도 유효하다면…….”“약속, 약속이라니?”오 년의 공백은 그다지 골이 깊지 않았다. 몇 번의 대화로 우리는 쉽게 골을 메워 버렸고 더 한층 신비롭게 다가갈 수 있었다. “있잖아요. 나를 확인하고 싶다는.”이번에는 내가 파하하하 웃었다.“매일 밤 확인해도 되는 특혜를 주고 싶어요.”-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