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 화남면 안천리에 위치한 백학학원은 ‘청포도’, ‘광야’의 시인으로, 학생으로 공부하다 교편을 잡아 후학을 기른 민족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해 조재만, 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열사 등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항일민족교육의 요람이다. 국가 현충시설로 지정(2013년)되고도 수 십년간 방치되면서 건물 대부분이 무너진 채 방치돼 왔던 백학학원이 최근 영천시의 국비를 지원받아 개 보수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민족교육기관의 역할을 한 백학학원이 복원 재정비 되고있는 것은 천만다행한 일이다. 제72주년 광복절을 맞아 460년이라는 민족교육기관의 훌륭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영천의 자랑인 백학학원을 소개한다. 편집자주
- 백학서원은 백학학원의 전신
백학학원의 전신인 백학서당은 명종 10년(1555) 당시 신녕 현감이었던 금계 황준량이 지역 유림들과 더불어 영천시 화산면 백학산 아래 건립했다. 그 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고 광해군 4년(1612)에 중건했다. 효종 9년(1658)에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
퇴계 이황에게 서당의 절목과 품제를 정해줄 것을 요청했고, 퇴계는 백학서당이라 명했다. 고종 5년(1868)에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00년에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다시 서당으로 복건했다.
이후 1921년 이곳에 창녕조씨 문중이 중심이 되고 지역의 유지들이 힘을 합해 신학문 교육기관인 백학학원을 설립하여 민족의식과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민족교육을 실시함으로써 많은 항일독립투사를 양성했다.
백학학원이 배출한 독립운동가로는 민족적 신념을 끝까지 지키기 위해 죽음으로 일제에 저항한 민족적 저항시인 이육사를 비롯하여 조재만,안병철, 이원대, 이진영 등이 있다.
-1920년대 유일한 사립학교 백학학원일제 강점기 영천 지역에는 모두 24개 교의 관립학교가 설립됐다. 당시 민간인들에 의해 세워진 사립학교에 관한 기록은 거의 찾을 길이 없다고 한다. 3·1운동 직후인 1920년대에 실제적으로 일반인들이 입학할 수 있었던 사립학교는 백학학원이 유일한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1921년 대창면 직천리에 노정용(盧定容)이 세운 직천학원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관련 자료를 발견하지 못해 당시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없고, 1939년 은해사 백련암(銀海寺 白蓮菴)에 조계종 5개 본산(은해사, 동화사, 기림사, 금용사, 고운사)이 힘을 합해 세운 오산불교학교는 도첩(度牒:승려 신분증)을 가진 자에 한하여 입학이 허용된 관계로 일반인들에게 아예 입학 자격이 없었다. 백학학원을 세운 조병건은 당시 인근에 신학문 교육 기관이 없어 대부분 지역 청소년들이 신학문을 접할 수 없게 됨을 늘 안타깝게 여겼다. 그는 백학서원 유생들의 극렬한 반대를 무릅쓰고 신학문을 위한 학교를 세웠다. 창녕조씨 문중과 지역민들의 협조로 백학학원을 개창해, 영천 지역에서는 민간이 세운 신학문 교육기관의 효시라 할 수 있다. 초대 학원장인 조병건은 조선이 개항되던 해인 1876년 화남면 삼창리(현고리)에서 조경승의 3남1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곽종석(郭鍾錫), 장석영(晦堂 張錫英)선생의 문인으로 학문이 뛰어나고 천성이 선행해 세상 사람들의 사표가 됨으로 인근은 물론 멀리서 몰려든 문하생이 백 여명에 달했다고한다.
-백학학원과 이육사의 인연
이육사는 안동 예안의 보문의숙에서 수학하고 17세 때인 1921년 영천시 화북면 오동리 대지주 안용락의 딸 일양과 결혼하면서 백학학원과 인연을 맺었다.이육사는 백학학원 보습반에서 학생으로 공부하다 교편을 잡고 후학을 양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1921년 백학서당에 문을 연 백학학원의 당시 입학생 수는 100여 명이었다. 다른 지역에서 신학문을 접한 학생들의 편입으로 학생 수가 180여 명으로 늘어 창녕조씨 문중재실에서 분산 수업을 하기도 했다.
1924년 백학학원 생도 모집 안내문은 ‘우리는 사람이외다. 더욱 따뜻하게 입지 못하며 배불리 먹지 못하는 많은 사람 중의 조선 사람이외다’ 로 시작해 교육이념과 민족의식을 알 수 있다.
-복원사업 추진
백학학원은 지난 2월 말 허물어진 백학학원의 개·보수 공사를 벌이고 있다. 공정율 80% 정도를 보이고 있는 백학학원은 올해 말까지 완공 계획이다. 복원에는 국비 1억6천800만원, 도비 1억2천만원, 시비 2억7천200만원 등 5억6천만원이 투입된다. 백학학원은 정면 6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양식 한옥이었다. 자치단체에서 백학학원 복원을 추진했지만 국비예산 확보가 되지않아 방치되면서 왼쪽 온돌방 1칸과 양 측면가적지붕(본채 옆 작은 지붕) 아래 2칸은 폐허가 돼 없어져 버렸다. 문짝과 대청마루는 모두 뜯겨나가고, 벽체도 파손됐다. 개보수 작업 당시 대청 2칸, 온돌방 1칸 등 3칸만 남아 있었다.
백학학원은 2013년 국가현충시설로 지정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았다. 하지만 복원비용이 마련되지 못해 어려움을 겪었다. 백학학원 복원비용이 마련된 것은 조인호 선생(현 경주신라공고 교장) 등 지역 향토사학자들의 노력도 있었지만, 특히 김좌진 장군의 손녀인 김을동 전 국회의원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당시 김 의원이 국가보훈처 국정 감사장에서 폐허가 되어가고 있는데도 방치되고 있는 백학학원에 대해 문제를 삼은 것이 복원의 계기가 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복원사업 이전까지 백학학원에는 잡초가 무성해 들어가기도 어려울정도로, 매년 광복절을 전후해서 관리상태를 지적하는 내용이 언론 보도의 단골메뉴가 됐다.
-문화유산 콘텐츠로 활용해야영천지역에는 백학학원을 비롯 복원만 하면 애국정신도 살리고, 문화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유산이 많이 산재하고 있다. 이번에 복원되고 있는 백학학원은 민족의식 고취 및 항일 독립운동 정신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전시관을 마련하고 문화재 신청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항일 사적지인 화북면 오산리 순국선열 이원대 열사 생가는 녹슨 철대문과 마당에 잡초만 무성하게 우거진 채 방치되고 있다. 허물어질 듯한 시멘트 담장에, 별채 처마는 지붕이 무너질까 나무로 떠 받쳐져 있는 생가는 유지 관리가 전혀 되지 않고 있는 느낌이다. 행정기관의 무관심으로 곳곳의 보존가치가 있는 문화유산들이 사라지거나 방치되고 있는 현장이다. 실제로 근대 문화유산 가치가 있는 영천극장이 최근 허물어지고 그 자리에 빌라가 들어섰다. 왕평 이응호의 생가터도 지역 문화인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허물어져 숙박시설로 변했다. 사라진 문화유산 대부분이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아 개발논리에 밀리면서 사라지게 된 것이다.
영천에 산재하고 있는 항일유적지와 근대문화유산을 보존해 후손들에게 산교육장으로 활용하는데 자치단체에서 관심을 기울여야할 것으로 보여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