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聖智의)해로움을 어찌 가히 기록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聖智를 버린다면 백성들의)이익이 백배가 된다고 함이 지나침이 아닌 것이다. 능히 이름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가히 더불어 이치를 말하지 못 할 것이며, 능히 이름을 규정하지 못한다면 가히 더불어 실제를 논하지 못한다.무릇 이름은 (객관적 대상의) 형상에서 생기지만, 형상은 이름에(의하여)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름이 있다면 반드시 이러한 형상이 있고, 이러한 형상이 있다면 반드시 그 나눠짐이 있게 된다.
어짊(仁)은 성인이라 말하지 아니하고, 지혜는 어짊이라 부르지 아니하니,곧 각기 그 실상이 있는 것이다. 대저 지극히 미세한(미묘한) 것을 살펴봄은 밝음의 지극함이며, 숨어 있음을 잘 찾는 것은 생각의 지극함이다. 능히 지극한 밝음을 다하는 것이 오직 성인이아니겠는가? 능히 지극한 생각을 다함은 오직 지혜가 아니겠는가? 「실」(實:명분에 대치되는 개념인 실리)을 헤아려 「명」(名:명분)을 규정함으로써 『「절성(絶聖)」을(이란 말을)살펴본다면 가히 의심됨이 없으리라.』 대저 두텁고 소박한 덕이 드러나지 아니하고「 명행」(名行:명분과 행실. 즉 형식적인 것)의 아름다움만을 드러내고 숭상한다면, 곧 숭상하는 바를 다듬어 그 명예를 바랄 것이며, 그 도(道)하는 바를 다듬어 그 이익을 바랄 것이고, 명예를 바라고 이로움을 바래어 그 행실을 힘쓴다면, 이름은 더욱 아름다워 지겠지만 정성은 더욱 멀어지고, 이로움이 더욱 무거워지면 마음이 더욱 경쟁하여, 부자와 형제가 이로움을 생각하고 정직함을 잃을 것이며, 효도에는 정성스러움에 임하지 아니하고, 자애로움에는 진실에 임하지 아니하니, 대개 「명행(名行)」을 드러냄이 부른 바이다. 풍속이 엷어짐을 걱정하면서도 명예를 일으키고 행하며 인의(仁義)를 높인다면 더욱 이러한 거짓에 이르게 되리니, 하물며 꾀가 이보다 못한 자에 있어서랴!
그러므로『 어짊을 끊어버리고 의로움을 버려 그것으로써 효도와 자애로움을 회복한다.』(는 말은) 지나친 것이아니다. 대저 성벽이 높아지면 충차(衝車:옛날 성을 공격 할 때 사용하는 무기)가 생겨나고, 이로움이 일어나면 더 많기를 구하는 것. 참으로 욕심이 없다면 비록 상을 준다 해도 도적질을 않을 것이며, 사사로운 욕심이 진실로 행한다면 교묘함과 이로움이(을 추구하여) 더욱 혼미해 지리라. 그러므로 교묘함을 끊고 이로움을 버리고 욕심 적음으로 대신한다면, (비록) 도적이 없다 해도 찬미할 것이 못된다. 「성지」(聖智:성인과 지혜로운 자)는 재능의 (가장)우수한 것이며, 인의(仁義)는 행실의 큰 것이고, 교묘함과 이로움은 쓰임의 좋은 것이다. 근본이 없다면 이 세 가지(즉 聖智.仁義.巧利)의 아름다움이 일어나 해로움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꾀가 이롭다고 하여 이것(교묘함과 꾀)으로써 소박함을 소홀히 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랴!
그러므로 옛 사람이 말을 하기를, 『지나치구나. 어찌 그리 깨닫기가 어려운가! 성인이 아닌 것을 성인이 아닌 줄은 알아도 성인이 성인 아닌 줄 알지 못하고, 어질지 아니함이 어질지 않은 줄 알지만 어짊이 어짊 아닌 줄 알지 못하는 구나』(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인을 끊은(성인을 성인이라 규정하지 않은) 후에 라야 성인의 공적이 완전해지며, 어짊을 버린 후 에 라야 어짊의 덕성이 두터워지는 것.대저 강함을 미워함이 강하지 않고자 함이 아니라 강 하려고 하면 강함을 (더욱)잃기 때문이며, 어짊을 끊는 것은 어질지 않고자 함이 아니라 어질어지려 하면 (더욱)거짓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다스리려 하면 더욱 어지러워지고 편안함을 지키려하면 더욱 위태로워진다. 자신을 뒤로하면 몸이 (저절로)앞서게 되는 것이니, 내가 앞섬은 내 몸이 앞섬이 능히 할 수 있음이 아니다.자신을 내버려두면 몸이 보존되는 것이니, 보존 됨은 자신이 보존되려하여 됨이 니다.
공적은 취할 것이 되지 못하고 아름다움은 가히 쓸 것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반드시 공적(功績)의 어미 됨을 취할 따름이다.(노자의)편에 이르기를, 『이미 그 자식을 알다』(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어미(근본)를 지킨다.』(라고 하였으니), 이 이치를 찾는다면 어디에 간들 통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