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뻗은 시골길을 달려 꼬불꼬불한 골목길 한참 끝에 참한 집 한 채가 나온다. 만나자고 약속을 했는데 주인없는 빈집에 대문이 활짝 열려 있어 어디 먼데 가지는 않았구나 생각하고 전화를 다시 거는데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들어온다. 이정은씨와 부군이다.
정은씨의 본명은 래티미 프엉(임고면 평천리)이다. 부리부리한 눈망울의 이씨는 2012년 1월에 베트남에서 왔다. 물론 그전인 2011년 9월에 ‘농촌총각 결혼하기’ 프로그램의 주선으로 베트남에서 먼저 결혼식을 올린 상태였다. 그녀의 집은 사이공(현 호치민)에서도 3시간 이상 가야 닿는 ‘빈농’. 시골냄새가 풀풀나는 곳으로 한국에 대해서는 의료봉사를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걸로 기억한다. 위로 언니 둘과 오빠가 한명 있다. 막내인 이씨는 갑상선암으로 돌아가신 어머니의 병수발을 오랫동안 했다고 했다. 그러나 보람도 없이 정은씨가 15살 때 어머니는 돌아가셨다. “그 이후로는 아무것도 하고싶지 않았어요. 그래서 맨날 큰언니네 집에가서 놀고 먹고해서 고생없이 컸다고 생각해요” 홀로 계신 아버지를 두고 시집올 때 마음이 짠했지만 이후에 아버지도 재혼 하셔서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고. 입국하고 한달쯤 뒤인 2월 13일 영보예식장에서 남편의 가족들을 모시고 다시 한국식 결혼식을 했다. “영천에 와서는 한동안은 집에만 있었어요. 시어머니와 남편 둘이 있었는데 80이 넘은 시어머니가 귀가 잘 안들리셔서 자꾸 큰소리로 고함을 질러 많이 놀랐어요”라며 처음 적응할 때의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가정을 일구고 이제는 아들 둘을 낳아 시골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가고 있는 그녀에게 지난 시간들을 물었다. 음식도, 문화도 베트남과는 사뭇 다른 한국, 낯설고 물선 곳에서의 생활에 가족은 언제나 든든한 지원군이었다고. 요리를 배운 지금, 그녀는 웬만한 한국음식은 뚝딱이다. 칼칼하고 맛깔난 김치찌개와 된장찌개도, 좋아하던 갈비찜도 이젠 척척 한단다. “첫 아이를 낳을때는 영천시내에 산부인과가 없어 대구까지 갔어요. 남편이 왔다갔다 하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요” 아이를 처음 낳아 키우면서 아빠, 엄마는 모두 전전긍긍하는 초보들이다. 더욱이 말이 통하지 않았던 그녀에게는 더 힘든 시기였다. 초보 엄마였지만 아이를 잘 키우고 싶었던 그녀는 언어문제로 고민이 많았다. 망정주공아파트에 사는 동료의 통역 덕분에 그나마 아이를 잘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6살과 3살인 아들 둘은 조교어린이집 에 다닌다. 인터뷰를 하던 이씨가 갑자기 밖으로 나가길래 잠시 놀랬는데 아이를 안고 들어온다. 3살짜리 둘째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왔다. 다문화지원센터에서 진행하는 행사에도 참여하고 특히 한국어 수업날에는 빠지지 않고 꼭 참석을 한단다. 11월에 있는 한국어 능력시험(TOPIC)을 위해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자랑하는 정은씨. 거기 합격하면 검정고시를 거쳐 성덕대학에 꼭 입학하고 싶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편의 적극적인 도움이 필요한데 잘 보살펴 주는 편이라고 답했다.
남편은 베트남 말을 좀 하느냐는 물음에는 피식 웃으며 전혀 못하는 데 아예 배울 생각을 하지 않는다며 눈을 흘긴다. 시골의 생활이지만 농사가 없는 정은씨네는 아침에 애들 어린이집 보내고 나면 특별히 할 일이 없단다. 그래서 딱히갈 만한데가 없어 매일이다시피 다문화 가족센터를 찾아간다고. 다문화센터에 가면 동료들이 있어 편히 얘기도 주고받으니 마음이 편해진단다. 남편이 중장비 운전을 하고있어 쉬는 날이 거의없고 가끔 비오는 날이면 가족들끼리 외식하는 게 여가라고 한다. “애들이 좀더 커면 시골학교에 학생들이 없어 폐교위기에 있는데 남편은 자꾸 시내로 가야하지 않느냐고 말합니다. 시내가서 저보고 조그마한 옷가게라도 해보라고 해요”라며 “조금 있으면 열리는 한약축제에 애들 데리고 놀러 갈려구요. 거기 가면 애들이 좋아할 것같다”면서 시내생활에 대한 기대감을 내보이며 웃는다. 주위에 베트남에서 온 동료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그들은 대부분이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삿철이면 바빠서 자주 만나지도 못한다고 했다. 어쩌다 연락이 닿아 만나는 날이면 베트남 음식을 같이 만들어 먹으면서 고향얘기를 나누며 수다를 떤다고 했다. 애들이 태어나기 전에는 남편을 따라 헬스장을 가기도 하고 필라테스도 했지만 지금은 아이들 때문에 남편 혼자만 다닌다며 아쉬워했다. 친정에는 얼마나 자주 가느냐고 물으니 1년에 한번씩 다녀 온다면서 자주 좀 가지 그러냐는 물음에는 경제적으로 부담이 돼서 그렇게 하고 싶어도 어렵다고 말한다. 언제 개명을 했느냐고 물으니 어려웠던 지난 시절을 줄줄이 널어 놓는다. 2년 전에 출입국관리사무소에 귀화를 신청했고 한국어교육 수료증을 제시하면 필기시험이 면제되는데 면접에서 많이 어려웠다고 한다. 다행히 합격을 해서 국적취득허가 신청을 하였고 호적을 만들고 3개월 뒤에 개명신청을 했단다.
그녀에게 다문화 가족이 잘 사는 방법이 무엇일까라고 대놓고 한번 물어봤다. 돌아오는 답이 정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문화생활 중 가장 힘들었던 것은 무엇보다 소통이었습니다. 가족의 따뜻한 관심과 사랑, 또 이해하고 보살펴주는게 없었다면 타국에서의 삶은 더욱 힘들었을 것” 이라는 그녀.“조금 답답하고 힘들어도 목소리 안높 이고, 서로 조금 참으면 다 지나갑니다”라는 말끝이 낭랑하다.사진을 찍으려고 마당으로 나오니 밭에 낯선 풀들이 가득하다. 묻지 않아도 그녀가 상냥하게 잘 설명한다. 베트남에서 자라는 식물들을 가져와 일부러 심었단다. ‘라오팝’이라는 베트남 콩과 ‘라무엉’이라는 채소를 소개해 줬다. 250여평의 넓은 집안에 큼지막한 텃밭같이 넉넉한 인심을 만나고 온 기분좋은 하루다.
최병식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