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개론(槪論)백학산의 가을. 앞에 보이는 강이 양강이다 내가 백학서원(서당)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알게 된 것은 1997년이다. 당시 영천에 살고 있는 안동권씨문중에서 문집을 우리말로 푸는 작업을 하게 되어 내가 그 일을 맡으면서부터다. 권응도(權應道 1616~1673)라는 분으로 46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출사(出仕)치 아니하고 향촌에 살면서 신녕향교의 교수직 등 후진양성으로 일생을 살다 간 분으로 그의 유문(遺文)인 풍영정일고(風詠亭逸稿)에는 도처에 백학서당에 관한 글이 남아 있다. 백학서당이 만들어진 시기는 금계황준량의 신녕현감 재임기간인 1552년으로 추정된다. 처음 서당이 세워진 곳의 산 이름은 양각산(羊角山)으로 영천시 화남면 대천리와 화산면가상리의 경계에 있는 산으로 높이는 226m이며 산의 시작은 화산(華山)이다. 영천시 화남면과 신녕면에 걸쳐있는 화산의 한 자락이 급격히 남으로 방향을 틀면서 만든 백학산은 대천리에 바라보면 마치 한 마리의 학이 날개 죽지를 펼친 형상이다. 전설로는 이 양각산에 퇴계와 금계 두 분 선생이 오른 뒤로 이름을 백학이라명명하였다한다.  ▫ 제 문헌상의 기록1. 화산지(花山誌) 백학서원은 신녕현 동쪽 30리 지점의 능산(陵山)의 아래 오도리(吾道里)에 있으며 본래 서기1552년에 세워졌다.(금계 황준량공께서 신녕 현감 재임 시 고을의 선비들과 더불어 백학산의 아래 양강의 위에다 서당을 건축하고서, 여러 차례 도산의 이 선생에게 질문하여 절목(節目)을 상정 (詳定)하고 그 서당의 이름을 청하자 선생께서 ‘백학서당’이라 명명하였고, 그로 인하여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 로 삼게 되었다) 임진년(1592년)에 병화(兵火)로 불타 임자년(1612년)에 중건하였으며, 효종조 무술(1658년)에 땅이 협소하고 위치가 궁벽하여 이곳 능산 아래 오도리로 옮겨 세웠고, 숙종조 무오년(1678년) 서당을 서원으로 하고 사당(祠堂)은 ‘상덕(尙德)’ 강당을 ‘전교(典敎) 누각을 ’풍영(風詠)‘이라 하였다. 고종조 무진년(1868년)에 훼철(毁撤)되었다가 경자년(1900년)에 다시 서당(書堂)으로 세웠다.2. 풍영정 일고(권응도(1616~1673년. 안동권씨 권덕시의 차자. 생원. 호풍영정)가. 백학서원 이건상량문(16 5 8년)3)새로운 터를 골라 옮겨 세우니 서원의 규모 이미 이루어졌고, 옛 제도를 따라 고치니 강학(講學)의 당우(堂宇)가 이에 만들어졌네. 긴 들보 밝은 날에 들어올리니 제비들이 두루 청금(靑衿)을 축하한다. 그윽이 서원을 경영하던 처음을 생각해보니, 지난날 국가가 밝았던 때였었지. 금계께서 스스로 지은 시 귀는 벽 사이에서 아름다운 옥처럼 찬란하며, 퇴계선생의 친필로 쓰신 아름다운 편액은 문미위에서 은고리로빛난다. 얼마나 우리 사림들의 긍식(矜式) 이 많았던가? 다행히 후학을 가르치는 곳(藏修)이 되었네. 비록 왜란에불타긴 했지만, 여러 사람의 의논에의해 다시 세워짐을 축하한다. 유풍(遺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지극한 가르치심 더욱 커지리. *정재진(丁再鎭)본관 나주(羅州) 시조공 휘 덕성(德盛)의43세손. 경북 영천 출생. 소방공무원으로 재직하며 여가에 향토사 등을 연구함.
즐겨찾기+ 최종편집: 2025-05-02 20:03:51 회원가입 전체기사보기 원격
트위터페이스북밴드카카오톡네이버블로그URL복사
동정
이 사람
데스크 칼럼
가장 많이 본 뉴스
상호: 경북동부신문 / 주소: 경상북도 영천시 최무선로 280 / 정기간행물 등록번호 : 경북, 다-01264 / 등록일 : 2003-06-10
발행인: 김형산 / 편집인: 양보운 / 청소년보호책임자 : 양보운 / 편집국장: 최병식 / 논설주간 조충래
mail: d3388100@hanmail.net / Tel: 054-338-8100 / Fax : 054-338-8130
본지는 신문 윤리강령 및 그 실요강을 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