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신앙의 구조는 맨 밑바닥에 생득적으로 발생한 자연신앙이 있고, 거기에서 정령숭배가 일어나고, 이 숭배에서 신령이나 조령의 신앙이 진전되고, 이와 함께 신당·감터란 신앙이 동반했다. 이 2차적인 민간신앙이 다시 성립종교와의 접촉에서 세속적인 혼합신앙으로 옮겨졌다. 그래서 민간신앙은 민간사회 층에서 중첩적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민간신앙을 한국인의 종교생활 체제란 측면에서 보면 성립종교의 밑에 정위되면서도 그 종교들의 기층부에 자리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우리 고래의 전통적 민간신앙은 세월에 흐름에 따라 비록 제반 양상은 바뀌어 갈망정 아직도 속신으로 민간 저변에 깔려 있는 요인은, 이러한 사상이 바로 한국문화의 지핵(地核)을 형성하고, 한국문화의 심층에서 여전히 그 에너지를 발휘하고 있으며, 우리들의 행동양식을 결정할 가치체계와 세계관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민간신앙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자연히 유, 불, 도교와 습합된 양상을 보이게 된다. 한국에서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 시기는 대체적으로 진평왕ㆍ선덕왕 이후로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하였다고 볼 수 있는데 그 원인은 이때부터 불교의 대중화가 싹트기 시작한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이렇게 변용된 원인은 그 일차적 원인을 무속과 불교가 그 기저에 공통분모를 갖고 있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차적으로는 이런 종교적 미분성의 기반을 지닌 채 불교가 한국적 종교 토양 위에서 성장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히 재래의 전통적인 무속 내지 민간신앙의 요소가 불교 속에 들어가고, 이렇게 불교와 무속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무속 쪽에서 다시 불교의 종교적 위력 내지 조직성을 원용하여 상호수수적 습합현상이 있게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하는 습합적 성향을 보이는 것은 유독 한국불교만의 현상이 아니라 불교 전반의 특징이다. 불교는 출가와 재가가 뚜렷한 종교적 관심의 차이를 갖고 있기에 출가는 초세간적 성격이 강하며 이런 이유로 재가의 현세구복적(現世求福的) 관심을 어느 정도 인정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러한 관심은 토착적 신앙과 습합 내지 묵인을 통해 충족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한국 민간신앙의 바탕 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외래종교가 불교다. 따라서 한국의 일반적 민간신앙에 가장 강력한 영향을 주었으며, 한편으로는 민간신앙과 가장 두드러지게 습합현상을 보이면서 민족종교로 발전하였다.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과정을 민간신앙의 불교신앙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춰 살펴보면 첫째는 불교 전개의 단계로서, 삼국시대에 불교가 전래되어 기존의 신앙체계를 토대로 정착하려는 시기이며, 둘째는 불교해석의 단계로서,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산지에 상당수의 가람(伽藍)이 창건되는 특징을 갖는 시기이고, 셋째는 불교 토착화의 시기로서, 12〜13세기 고려 중기 이후로 가람 내부에 민간의 신앙이 불교화 되는 구체적 증거인 칠성각ㆍ삼성각ㆍ산신각 등이 건립되는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세 번째 시기를 주목해 보았다. 이 시기에 불교는 밀교적인 방편불교에만 머물지 않고 불교 본연의 사상체계를 형성해 나가게 되며 신라 통일기에 화엄사상을 기반으로 불교 전래 이후의 신앙적 기반을 토대로 점차 토착화되어 가게 되는데 이 시기는 민간신앙과의 관련에서 볼 때 매우 중요한 시기이다. 그것은 부석사를 비롯한 신라의 산지가람(山地伽藍)들이 대부분 이 시기에 창건되었으며, 초기의 방편적 기능에 머물렀던 불교가 신라사회에 주도적 사상으로 등장하게 되고, 가람의 입지 장소가 산지로 택해지면서 민간의 신성한 지역으로 여겨지던 지역에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불교와 민간신앙의 습합이란 의미로 볼 수 있는데, 불교의 자연관이 신성한 장소를 택해야 한다는 교리적 측면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사회적 상황이 사상적으로 고등한 논리를 갖고 있었던 불교가 그 발전과정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낮은 논리를 지닌 기존의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불교로 대체하려는 의도적인 측면이 더 강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