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새해 벽두부터 조선후기 영천의 대학자 훈지양선생(정만양·정규양)과 제자들의 문답을 기록한 󰡔계상훈춘록(溪上薰春錄)󰡕을 찾아냈다. 먼저, 25년 동안이나 영천관련 문헌자료나 문화원형을 되찾아 오며 혼자 고군분투하고 있는 영천역사문화박물관 지봉스님께 경의를 표한다. 이 필사본은 영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당으로 널리 알려진 화북면 횡계리에 위치한 횡계서당에서 강학했던 조선 후기 영천출신의 대학자 훈수(塤叟) 정만양(鄭萬陽)과 동생 지수(篪叟) 정규양(鄭葵陽) 형제가 가르친 문인, 이홍리(李弘离)가 두 선생의 가르침을 기록한 문답집으로, 󰡔계상훈춘록(溪上薰春錄)󰡕이라는 이름을 가진 미간행 원고본 5권 5책으로 구성된 완질본이다. 즉, 제자가 묻고 스승이 답한 내용을 기록한 내용이 담겨있다. 이 책을 집록한 조선후기 학자 이홍리(李弘离)의 생몰연대는 1701년(숙종 27)∼1778년(정조 2)으로, 자는 맹유(孟猷)이고, 호는 용와(慵臥), 본관은 경주(慶州)다. 거주지는 경북 영천(永川)으로 부친 이해겸(李海謙)과 모친 손여증(孫汝曾)의 딸 월성 손씨(月城孫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20세가 되지 않아 정만양(鄭萬陽)과 정규양(鄭葵陽) 훈지형제의 문하에서 수학했고 경학(經學)만 공부한 것이 아니라 제자백가서를 비롯한 천문 ‧ 율려‧ 지리‧ 역수 등을 두루 섭렵한 박식한 인물로 기록됐다.계상훈춘록의 내용은 경사(經史)는 물론, 성리학 · 예학 · 천문 · 지리 · 역학 · 경제 · 정치 · 율려 · 과제 등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을 수록하고 있어 당시 훈지선생이 제자들을 어떠한 관점에서 지도했는가 하는 학문적 경향을 살펴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화북면 보현산에 천문대가 생긴 이유도 조선후기 영천지역 천문학자라고 해도 부족함이 없는 훈지선생의 기운에 의한 것이 아닐까 하는 스토리텔링도 문화원형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근거로 보인다. 各卷의 권두에 門人月城 李弘离가 輯錄하였다는 내용과 卷四 말미에는 丁亥(1767)春 正月 丙寅 門人月城 李弘离拜手書의 기록이 자세히 필사되어 있다.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정만양의 생몰연대를 살펴보면 1664년(현종 5)∼1730년(영조 6)이며 정규양의 생몰연대는 1667년 ~1732년으로 지수선생이 돌아가시고 난 뒤 약 35년 후에 목판으로 간행하기 위해 만든 원고본이다. 第2冊 표지 內面에 필사된 `薰春錄 旅岩宅家寶` - ‘훈춘록은 여암댁 집안의 가보이다.’ 기록과 함께 七言節句의 漢詩 한편과 橫溪李氏家藏 - 횡계에 거주하고 있는 이씨 집안에 보관된 것이라는 기록이 있다. 퇴변색과 얼룩이 조금 있으나 본문 상태 양호하다. 조선의 한 시대를 살아온 영천의 수많은 학자들, 그들의 처절한 삶이 담겨져 있는 지식의 보고(寶庫)인 인문학적 자료들이 제대로 평가되지 못하고 묻혀버리게 되는 것이 아닌지 역사와 문화를 조금씩 배워가는 과정에 그 문제를 화두를 던져놓고 누구든 지혜로운 사람들로부터 좋은 의견들을 듣고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