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시 창구동 1번지는 조양각(朝陽閣)이란 정 자가 자리한 곳이다. 조양각은 고려 말 당시 이곳 부사(府使)였던 이용이 남천 위 절벽 위에 정자를 지으면서 명원루(明遠樓)라 명하였다. 그러나 잦은 병란과 많은 시간이 흐르면서 퇴락(頹落)과 중창 (重創)을 거듭하며 지금에 이르면서 서세루 조양 각 등의 이름으로 불리웠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한해전인 1591년에 만들어진 영천읍성. 조양각은 그 읍성의 중심이기도 하였으니, 1592년4월13일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그해 4월22일 영 천성은 지키는 군사 한 사람 없이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해 7월부터 시작된 영천성 수복은 순수한 의병의 힘만으로 7월27일에 이루어져 초기 급 격히 무너진 전선을 수습하고 수비에서 공격으로 전환 하는 등의 전쟁의 양상을 크게 바꾼 기념비적인 사건 이었는데, 바로 이 전쟁을 기록한 것이 영천복성비다. 이 비석이 만들어진 것은 1832년(엄격히 발하면 비문이 씌여진 것이 1832년이고 정작 비석이 세 워진 년도는 미상. 어쩌면 1930년대에 세워진 것 으로 추정)이었고 세워진 곳은 임진란 당시의 전 장이었던 조양각 앞이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1930년경 훼손되어 비신(碑身)은 영천시 신녕면 화남리(갑티마을) 입구에 위치한 경충사 경내 어 딘가에 묻혀 있다고 하며, 나머지 부분은 영천경찰 서에 있다고 한다. 이 글은 화산군 권응수 공의 백 운재 실기 중에 실려져 있는 것을, 본인이 국역하 여 원문과 역문을 아울러 실음으로써 역사 이해에 도움을 주고자 한다.  □영천복성 비명(서문을 아우름)-역문 및 원문 만력(萬曆) 임진년 일본의 왜구(倭酋)들이 조선 을 침공하니 그 병력이 백만으로 불리워, 뱃머리와 배꼬리가 바다를 뒤덮고 대포와 돌 화살 소리가 하늘로 솟구치며(진격함으로써) 만나는(백성과 군 사들을)모두 섬멸하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은 모두 달아나고 숨었으니, 왜병들은 노래하고 춤추며 고 개를 넘어 우리의 무덤과 집들을 불사르고 (임금 의)수레는 서쪽 변방으로 떠나는 바람에 서울(京 城)은 지키는 이가 없었으니, 예로부터 전쟁의 재 앙이 이처럼 혹독한 적이 없었다. 이때 충의공 권 응수가 있어 의병을 영남에서 일으켜 먼저 영천을 수복하여 그들의 소굴을 없애고, 앞뒤 무릇 십 여 차례의 전투에서 (적들의 목을)벤 것이 수를 헤아 릴 수 없어 그 공적이 매우 커서, 군자(君子)들은 왜적을 토벌한 전투를 일컬음에 바다에는 오직 이 충무공이 있고 육지에서는 권충의공이 있다는 말 은 참으로 확론(確論)이라 하겠다. 임진년 4월 왜적은 동래를 함락하고 울산으로 진공(進攻)하였는데, 공은 아우인 응전 응평 사촌 동생인 응추 응심 응기와 고을 사람(鄕人)인 이온 수(李蘊秀) 정응거(丁應琚)와 더불어 의병을 모집 하여 100여명을 모았다. 이때 적들은 이미 경주를 얻고 군영(軍營)을 연이어 영천에 이르렀더니 영천 엔 지키는 이가 없어 드디어 (영천성으로)들어와 의지하여 정예병사(精兵) 수 만 명이 줄을 지어 진 채(陣寨)로 주둔하여 기각지세(掎角)를 (이루었다)  (그리하여)의성과 군위 대구 세 갈레의 적들은 똑 바로 600리를 서로가 시체를 베고 누워 (인가 에는)개와 닭 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공은 의 병들을 새로 모았지만 병기는 굳고 완전하지 않아 한갓 의기(義氣)로서 서로를 감격(感激)시켜 진격 하여 대동(大洞)에서 적들과 싸워 (적을)패배시키 고, 또한 유격병(遊兵)들이 들이닥쳐 한천(漢川) 에서 활로 세 명의 적을 쓰러뜨리고 칼로 (적의 목을)십여 수(首)를 베었다. 또한 토적(土賊)들이 왜 적들과 내통한 자들을 모두 섬멸하여 이에 의성으 로 통하는 길을 끊었다. 이때 여러 고을들의 의병 장 등은 소속된 곳이 없었다가 공이 전투로 몇 번 이겼다는 말을 듣자 의병들을 데리고 찾아와 의사 (義士)60여명이 초유영(招諭營)으로 글을 보내 한 사람의 절제(節制) (선정하여)주기를 원한다고 했 더니, 초유사인 김성일공이 격문(檄文)으로 공을 대장으로 삼았다. 이에 (영천)군수 김윤국 현감 곽회근 생원 조희 익 정대임 정담 조성과 하양(현감)신해 의흥 홍 천뢰 자인 최문병 경산 최대기 등은 모두 (소속) 의병들을 이끌고 공에게로 귀부(歸附)하여 군 대의 명성(軍聲)을 크게 떨쳤다. 공은 여러 장수 들을 3등분으로 나누어 적을 맞아 박연(朴淵)의 위로 (적들을)달아나게 하고 또한 (이들을 군위) 소계까지 추격하여 죽임으로 이에 군위로 통하 는 길을 끊었다. 공은 일어나 여러 장수들에게 말씀하기를 ‘영천은 영남지방의 요충지이며 적들이 의거하여 소굴이 되었 으니 마땅히 급히 쳐서 뽑아야 할 것입니다’라 하고 여 러 장수들을 나누어 보내 여러 고을의 병사들을 징발 하고, 따로 조종악 등을 보내 병사들을 징발하고 군량 미를 나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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