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짓는 작업 현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방바닥 단열을 위해 스치로폼을 깔아야하는 공정이 있다. 온 장을 깔아나가다보면 부분 부분에 맞추어 퍼즐 맞추듯이 잘라 넣어야 하는 부분이 생긴다. 100mm 두꺼운 스치로폼을 자르다보니 칼날이 그만 똑 부러졌다. 여분의 칼날이 없고 날은 저물어가고 작업량이 얼마 남지않아 급한 마음에 부러진 칼날을 잡고 힘껏 눌러 스치로폼을 자르려는 순간, 손가락 끝의 느낌이 이상하다. 벌써 빨간 피가 배어나오고 왼손으로 오른손 검지를 움켜잡는다. 찰나에 칼날은 살속을 파고든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이 찰나지간에 일어난다. 사실 시간이라는 것은 찰나의 연속이다. 눈 깜짝하는 것보다 더 빠른 인식되어지지 않는 찰나가 모여서 시간을 이루고 있으니 인간의 지각 능력이라는 것은 어찌보면 참으로 부질없다. 사람은 부지불식간(不知不識間)에 이러난 상황을 어쩌지 못한다. 그저 멍할 따름이다. 어쨌거나 일어난 상황을 빨리 수습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 찰나의 순간에 온갖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병원에 가야 하나, 왜 내가 이런 실수를 하나, 쪽 팔려서 어쩌지, 어이구 정말 바보 같아 ……. 얼마 전에 톱날에 왼손 엄지를 다쳐 병원에서 꿰매고 다니다 겨우 상처가 아물만하니 다시 오른손 검지다. 그러니 다시 또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는 것 자체가 창피다. 한참을 움켜쥐고 있으니 피가 멎는다. 차 박스에 둔 비상용 대일밴드를 두 겹으로 두르고 앉아서 먼 산을 바라본다. 제법 깊이 베인 터라 쓰리지만 피가 멎었으니 된 일이다. 집으로 가서 상처를 소독하고 약 바르고 그냥 넘어가자. 상처부위가 매끈하니 꿰매나 밴드로 딱 붙이나 서로 붙는데는 별반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나니 그냥 무덤덤해진다. 나는 이병철 선생의 “푸르게 깨어 있기를” 이라는 제목의 시를 자주 읽고 소개도 한다. 미루다가 어쩔 수 없이 예초기를 든다 / 여름 그 타는 불볕에도 깊게 뿌리한 풀들이 / 집 안팎을 에워싸 어느새 무성한 숲을 이루었다 / 어차피 베어야 할 것들이긴 하지만 / 베지 않아야 할 것들이 그 속에 함께 있다 / 예초기를 메고 풀숲에 들며 만트라를 왼다 / 푸르게 깨어 있기를 ---중략 --- 이 여름 모진 가뭄을 견딘 뒤 다시 잎을 추스르는 어린 묘목을 자르고 / 가을을 기다리며 애써 꽃망울 매다는 국화도 자르고 / 아직 노란 꽃들 눈부신 수세미 덩굴도 자르고 / 오늘 미안하다는 그 말을 몇 번이나 했는가 / 그 때마다 이렇게 잘라진 것들이 몇 개인가 생각하는 그 찰나 / 내 의식이 놓친 칼끝은 수련을 심었던 항아리마저 깨어놓았다 / 한 생명 앞에 / 한 존재 앞에 깨어 있다는 게 어떤 것인지 / 왜 당신 앞에 푸르게 깨어 있어야 하는지를 / 깨어져 나간 항아리가 / 푸른 피 흘리며 잘려나간 여린 생명들이 다시 일깨운다 / 마지막 그 순간까지 푸르게 깨어 있기를 며칠인지 인식하지도 못하는 사이 그렇게 상처는 아물고 새 살이 돋는 듯했다. 그러나 그런 후에도 나는 푸르게 깨어 있지 못하고 여전히 이것저것 일을 하면서 안전 주의에 부족하다. 어쩌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안전불감증에 중독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 내가 안전불감증을 퍼뜨리는 감염원이지도 모를 일이다. 팔월 그 무더운 여름날, 날카로운 전동 글라인드 날로 또다시 왼손 검지를 반 이상 잘라 입원하는 처지가 되고 보니 한심하기 그지없다. 돌이켜보면 너무도 어이없다 싶은데 다시 생각해보니 참으로 위험한 도구를 만지면서 안전에 대해 전혀 대비할 생각을 않은 채 작업을 시작한 것이다. 찰나의 방심이 사건을 만들고 그나마 나 자신이 다친 것으로 위안을 삼아야 하는 나 자신이 너무 한심하다. 이제는 거의 치료가 된 상태지만 아직도 붕대를 감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다시 다짐한다. 한 순간도 방심 말고 푸르게 깨어 있기를. 그리고 추석 명절을 맞아 조상 묘소 벌초 다니는 모든 분들 조심해서 다치는 일 없으시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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