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모두(冒頭)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노계문집에는「행장(行狀)」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되었지만 원작자인 지수 정규양의 문집에는 「노계박공유사(蘆溪朴公遺事)」라고 되어 있으며, 그리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군데군데 첨삭(添削)이 가해졌는데 몇 가지 의심나는 부분을 논한다면 행장(유사) 첫머리에 언급한 ‘말을 함에 가리지 않는다(口無擇言)’고 하셨는데 후반부에 가면 ‘입으로는 다른 사람의 허물이나 잘못을 말하지 아니하고(口不言人過失)’라고 한 사실과, 안분음의 가난함과 행장 후반부의 ‘일찍이 밭 수 천 평을 농사지었는데(嘗治田數百畝)’라는 부분과는 서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다시 말하면 선생의 경우 말씀을 하심에 상대방의 눈치를 봐가며 할 성품의 소유자가 아니며, 또한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한 형편임은 불문가지다. 즉 같은 사람이 쓴 행장 내에서도 앞뒤의 모순이 발견된다.
또한 큰 아들의 이름을 유사(遺事)에 충립(忠立)으로 한 것을 행장에는 흥립(興立)으로, 유사에서 사위 박천득(朴天得)을 행장에는 김세온(金世溫)으로, 유사에서 부실(副室)과 부실의 소생(所生)을 남녀각일(男女各一)로 한 것을 행장에는 후실(後室)과 소생(所生)을 왈효립(曰孝立)으로 기록의 다름인데, 비록 개인적인 가족사이긴 하지만 자손들의 이름이 다른 것은 매우 중대한 사안(事案)인데다, 또한 후실(後室)과 부실(副室)의 차이는 상당하다. 후실(後室)은 계배(繼配)로 보아 본부인의 사후(死後) 부인이 된 경우지만 부실(副室)은 측실(側室)과 같은 의미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다음은 노주다. 지금이야 교통과 자동차의 발달로 잠깐의 시간이면 충분히 다녀 올 곳이지만 당시의 여건으로 보면 도천과 노주와의 거리는 결코 만만한 짧은 거리가 아니다. 적어도 관도(官道)를 따라 말을 타거나 수레를 탄다 해도 하루 이상이 걸릴 그 거리. 그러나 그 길은 400년에 가까운 시간이 무색하리만치 내가 선생을 추상함에 있어 어려움이 없다. 몇 해 전 영천 향토사연구회에서 세운 기념비에는 ‘수양(修養)을 위해 노곡을 찾았다’고 하지만 나의 생각은 다르다. 상전벽해의 시간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지만 지금도 노곡의 풍광은 빼어나다. 그러므로 당시 분주한 홍진(紅塵)을 떠나 아름다운 산수 속에서 조용히 여생을 보내고자 하는 사람에게 있어 노주(蘆洲)는 최상의 선택임은 분명하다. 노곡에 도착한 직후 지은 것으로 보이는「노계가(蘆溪歌)」에서 늘그막에 노곡을 찾은 명분을 서술하고 이어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다. 주인도 없이 마치 자신을 기다리기나 한 듯 반갑게 맞아주는 노주를. 하지만 7년여의 시간이 지난「노주유거(蘆洲幽居)」에 이르면 상황은 급변한다. 한시바삐 고향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에 자신의 귀향을 저지하는 사람들의 손을 야멸차게 뿌리치며 자신이 고향에 가야 하는 이유와 명분을 설파하는 부분에 이르면 아무리 무딘 강철의 심장인이라 해도 무심할 수가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