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아(大我)를 위하여 소아(小我)를 버리고 오직 목숨과 몸을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바쳤을 때를 가리켜서 대의(大義)라고 하는 것이다. 무량수(無量數)의 군성(群星) 가운데 혜성처럼 번쩍이는 사람만이 역사의 한 줄거리를 찬란케 하는 것이니 여기에 우리 선열들이 국가를 위하여 생명을 초개같이 바친 민족의 큰 별이 있다. 일찍이 일제의 야만적인 간계로 소위 을사늑약이 맺어지자 때는 암담음참(暗澹陰慘)하게 되어 조국의 햇빛은 어두워져 바람찬 역사의 암흑이 짙어 민족의 발걸음은 어두움 속에 헤매게 되었다. 마침내 정의의 칼을 뽑아들고 조국의 주권을 되찾기 위해서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붉은 피를 제물로 바치기에 주저함이 없었다. 그가 바로 산남의진(山南義陣)의 거룩한 의기요 피묻은 역사다. 죽지 않는 민족의 얼이요 영원히 살아있는 대의의 넋이다.이 글은 1970년 김상기(金庠基) 박사가 쓴 산남의진유사(山南義陣遺史)의 서문(序文) 앞부분이다. 나라나 정의, 명예로움보다 권력이나 부의 축적, 개인의 행복을 앞세우는 요즘 세태에 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일 터이다. 광복 70주년이 지났지만 우리는 여전히 심각한 후유증을 앓고 있음을 사회 곳곳에서 보이고 있다. 청산을 부르짖고 있는 적폐 속에는 거의 일제의 잔재가 숨어있다. 이 열전을 쓰기 위해 산남의진유사를 거듭해서 읽으면서 나 자신의 삶을 들여다보는 시간들을 다시 가져본다.백남신(白南信) 의사자는 신근(信根), 관향은 수원(水原). 경주부 죽장현(현, 포항시 죽장면)에서 계미(癸未. 1883)년 출생. 16세부터 총쏘기를 좋아해 포수로 유명하였다. 일찍이 이한구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 있다가 스승을 따라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도포장(都炮將), 우익장(右翼將), 선봉장(先鋒將) 등으로 활약하였다. 적에게 붙잡혀 7년간 옥고를 치르고 나와 지하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았다. 1946년 거행된 산남의진순국장병 위령제와 1963년 거행된 산남의진기념비 제막식에 참석. 1964년 서거 <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391〉대구 신암선열공원 애국지사 묘역에 백영촌(白永村)이란 이름으로 안장. 1977년 건국포장, 1990년 애국장 추서.이용훈(李容勳) 의사자는 윤오(允五), 호는 기암(騎巖), 관향은 청안(淸安). 1869년 영천군 자양리에서 출생. 동엄 정환직 선생이 도찰사(都察使)로 삼남(三南)을 순찰할 때 사제지의(師弟之誼)를 맺었다.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활동하다가 모친의 병 구환을 위해 집에 머물며 대외활동을 하였다. 동엄선생이 순절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자양면민이 이용훈(李容勳), 이석구(李錫龜), 권치상(權致祥) 세 사람을 대표로 뽑아 그 시신을 수습하여 검단동산에 안치하였다. 다시 진중에 들어가 활동하다가 의진이 흩어지매 산중에 은거하여 음양복서지술(陰陽卜筮之術)로 세월을 보내다가 1940년 서거. <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395〉임용상(林龍相) 의사자는 충서(忠瑞), 관향은 나주(羅州). 기상이 숲속의 범과 같아 임중호(林中虎)라 불렀다. 청송부 현서면 수락동에서 출생하였고 성균관진사 민응용 선생의 문하에서 통사(通史), 사서삼경(四書三經), 그 밖의 외전(外傳)을 두루 강습하였다. 효성으로 군민의 모범이 되어 나라의 표창을 받기도 하였는데 1905년 동지들을 규합하여 동해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하다가 산남의진에 입진하여 부도총장(副都總將)으로 활동하였다. 산남의진이 일시 흩어졌을 때 영덕 청련사에서 의사 80여명을 모아 창의대장으로 추대받았다가 다시 본진의 동해방면 유격장(遊擊將), 좌포장(左炮將), 훈련장(訓練將)으로 활약하였다. 최세윤 대장이 취임한 후 운문산을 거점으로 북쪽으로 고령, 현풍, 달성, 대구, 경산, 하양, 자인, 경주, 남쪽으로는 거창, 합천, 초개, 창녕, 영산, 밀양, 언양, 울산, 칠원, 함안, 진주 등지에서 유격전을 펼치다가 끝내 피금되었다. 3년형을 언도받고 1년 후에 석방된 뒤 다시 청송 일대에서 유격대장으로 전투하다가 붙잡혀 10년형을 받고 1910년 합방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청송에서 대구로 이사하여 지하공작활동으로 안일암 회의, 달성공원광복회, 의열단, 군정서 등의 활동에 협조하다가 다시 검거되어 4년을 복역하고 출옥하였다. 51세 때에 만주로 건너가 정의부에 가담하여 군자금 모집을 맡았고 해방 후에는 건국 준비에도 참여하였다. 1958년 81세로 서거. 1964년 대구 신암선열묘원에 이장하고 묘비 제막. 1969년에는 중호 임용상 의사의 전기가 반포되고 대구남구 대명로타리에서 기념사업회 발족. <山南義陣遺史 제5편 列傳 P403〉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 어떤 자료에서는 건국훈장 국민장이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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