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닻을 올렸다. 여기에 이르기까지 물리적이고 심리적인 시간이 너무 길었다. 역사이래 가장 비참했던 임진왜란. 어떤이는 당시 동아시아 국제질서를 요동케 한 ‘세계대전’으로 일컫는다. 파죽지세로 조선땅을 노략질하던 왜군. 그 와중에 우리 영천성도 맥없이 적들의 발아래 짓밟혔다. 임진란 영천성 수복대첩. 427년전, 거의 무방비 상태에서 속절없이 무너져 버리던 관군을 대신해 이름없이 죽어간 우리 지역의 민초들이 이루어낸 혁혁한 전공으로 승전의 의미나 영향이 매우 크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 13일 부산포에 왜군 선발대가 도착했다. 부산성을 점령한 왜군중 제2번대 가토 기요마사의 군대가 4월 19일에 언양, 21일에 경주를 점령했고, 다음날 영천으로 진격했다. 왜군이 나타나자 영천성을 지키던 군수 김윤국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않고 성을 버리고 기룡산 묘각사로 도주했다.
무혈입성한 왜군은 성에 1,000여 명의 군사만 남겨 둔 채 주력부대는 충주 방향으로 북진하였다. 영천에 주둔한 왜군이 읍성을 거점으로 약탈과 방화 및 살육을 자행하고, 심지어 조상의 묘까지 파헤치니 참지 못하던 25개 문중이 유학자 정세아의 집 주위에 몰렸고 의병을 일으켰다. 영천에는 유학자 정세아(鄭世雅)·정대임(鄭大任), 신녕에서는 무장 권응수(權應銖)가 중심이 되어 인근 자인과 의흥 등 여러 지역 의병장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여 성밖에서 성안으로 왜군을 공격했다. 전투는 7월 28일 끝났고 영천성을 수복함에 따라 경주·영천·안동을 잇는 왜군의 보급로는 차단됐다. 영천성 복성전투는 임진왜란 초기 아군이 승리를 거둔 최초의 전투로 의병이 승리를 거두었다는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그럼에도 이 역사적 사실이 오랜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져 있었다. 그 이유가 전투에서의 논공행상과 문중간의 갈등이라고 알려져 있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하지만 이제 그런 딜레마에서 벗어나 한단계 도약하는 계기가 되어야 할 때다. 다행히 그런 와중에도 복성전투를 주제로한 백일장이 열리고, 2015년에는 학술대회를 열기도 했으며, 최근에 ‘찾아가는 역사박물관’ 전시를 통해 수복전투를 꾸준히 알리는 노력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기념사업회가 출범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왜 우리 스스로 영천을 호국의 성지라고 감히 말하는가의 이유가 여기서 시작된다. 오직 백성들 힘으로 지켜낸 역사적 사건이다. 다른 곳에서는 찾기가 힘든 우리만의 너무나 소중한 정신문화의 자산이 아닌가. 이처럼 의미가 깊고 중요한 역사적 사실앞에 후손인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자명하다. 우리의 노력에 따라 할 일은 산더미다. 당장 무너져 내팽개 처져있는 복성비 다시 세우기부터 시작해야 한다. 고증을 통해 성을 복원할 수도 있고 관련 컨텐츠 개발도 필요하다. 조례로 제정된 기념일에는 다양한 행사와 학술대회 등으로 기념해야 한다. 장차 기념관이나 박물관도 짓고 관광.문화사업으로 발전시켜 지역 경제에도 도움이 되면 좋을 것이다.
시민사회의 공감대 형성을 위한 교육이나 홍보도 중요하겠다. 어느 분의 염려처럼 선조들이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한 맹세가 오늘날 분열의 씨앗으로 움터 오른다면 차라리 아니한만 못함을 경계해야 한다. 지배를 당했던 우리가 일제 식민지 역사를 지배한 그들보다 더 모른다고 해서야 될 일인가. 자랑스러운 역사적 사실 앞에 그것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것이면 후손으로서 당연히 해야할 일임에 틀림없다.
또 하나의 사업회. 시민들이 일반적으로 갖는 시각으로의 공해같은 단체. 또 하나 만들어서 예산만 타내 허비하는 그런 단체가 아니길 바란다. 시민들이 갖는 우려를 잠재우는 톡톡 튀는 사업들을 꾸준히 발굴하고 문화상품으로 승화시켜 아프지만 위대한 역사가 더욱 빛을 발하게 만드는 일을 하는 단체가 되길 바란다.
이사장을 비롯한 구성원들이 ‘창의정용군’보다 치열한 논의과정을 통하여 자랑스런 역사적 사실을 보존, 기념해 줄 것을 믿으며 지역사회에 우뚝서는 모범적인 단체로 거듭날 것을 기대한다. 그러한 노력의 끝에 마침내 ‘임란 영천성 수복대첩’이 중고등 역사교과서에도 실리는 또하나의 승리가 거두어지기를 손꼽아 기다리며 염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