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약2,500년 전 공자학단에서는 수업이 한창이었다. 이때는 공자가 14년간에 걸친 천하주유가 끝나 고국인 노나라 곡부에 있는 자신의 집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을 때였으니 나이는 일흔에 가까운 공자 생애의 만년에 해당된다. 당시의 제자들은 증삼(증자)을 비롯한 신진(新進)으로 공자와의 나이가 많게는 50여 살에서 작게는 40살 정도가 차이나는 젊은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그날의 강의가 끝나갈 무렵 공자는 제자들에게 말한다.“너희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가 일생을 두고 깨닫고 추구한 것은 오직 하나일 뿐이란다(吾道一以貫之)”라는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하였고, 이에 증삼은 한 순간의 지체함도 없이 “예 선생님(曾子曰唯)”이라 대답을 하자 이어 공자는 방문을 나선다.
이에 대하여 여러 제자들은 도무지 스승과 제자사이에 주고 받은 말이 무슨 뜻인지를 몰라 의아해 하자 증삼은 말한다.
“우리 선생님이신 공자께서 일생을 두고 깨닫고 추구하신 것은 충(忠)과 서(恕)라는 의미란다(夫子之道忠與恕)”라고. 그렇다면 충과 서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충(忠)이라는 글자는 가운데 중(中)과 마음심(心)자가 합성된 글자이니 한쪽으로 ‘치우치지 아니하다. 공평하다. 정성스럽다. 충성하다’ 등의 의미로 쓰이는 글자로써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공평함이다.
그리고 서(恕)자 또한 같을 여(如)자와 마음심(心)자가 결합된 글자로 ‘남의 처지에서 상대방을 이해하다. 용서하다’는 의미로 사람의 마음이란 다른 부분보다는 비슷한 부분이 많다는 의미가 된다. 즉 공자는 불우한 환경에서 자라나면서 이 두 글자의 의미로부터 사람이란 근본적으로 비슷하며 그리고 무엇보다 공평함이 최고의 가치라는 보편자를 이끌어 내고 이를 일생동안 실천함으로써 급기야 만세의 사표가 된 것이다.
존중(尊重)과 배려(配慮)란 별개의 말이 아니며, 아울러 상대방을 위하는 이타(利他) 또한 아니다. 이 말의 근본을 되짚어보면 사람의 마음이란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이 또한 좋아하며,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 또한 싫어한다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가능하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으로 상대방에게 베풀고 내가 싫어하는 것은 상대방에게 베풀지 않아, 어떤 경우에서도 남 대하기를 자신과 같이 하며 타인의 입장을 자신의 입장으로 돌려 생각하면서 공평무사하게 사람을 대하여야 한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己所不欲勿施於人).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공자가 말씀하신 충서의 의미를 제대로 인식하고 행동한다면 그야말로 사회는 존중과 배려로 넘쳐날 것은 분명하며, 나아가 만세(萬世)토록 지상낙원을 이루어 만인(萬人)이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