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카르텔’이란 말이 나왔다. 내년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당들이 총선기획단을 출범 시키면서 민주당 쪽에서 나온 이야기다. 지난 8월 이후 지속된 조국사태를 거치며 당내에 반성과 쇄신을 주문하는 자리의 이야기다.
언제나 ‘소통’이 문제다. 신문사도 그렇다. 안으로는 편집 구성원들 간에 커뮤니케이션이 원활히 되도록 해야하고, 밖으로는 독자들과 소통의 길을 열어야 한다. 독자들도 연령대가 다양하고 각자의 상황에 따라 관심사가 다르니 희망 사항과 불만 또한 천차만별일 것이다. 언론매체를 통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 또한 존중되고 반드시 보장되어야 한다. 풀뿌리 민주주의 사회에서 이러한 개인의 표현의 자유를 최대한 존중하고 올바른 여론을 조성하는 데 기여하는 것이 우리같은 지역신문의 역할 중 하나이다.
우리 신문의 오피니언란도 주민들의 다양한 여론을 싣는, 지면을 통한 하나의 주민소통의 장이다. 시정에 관한 현안이든 우리지역 사회상에 대한 문제든, 찬사든 비난이든 찬반양론 자유로운 개인의 의사를 펼칠 수 있는 장이다. 또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표현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혹여 잘못된 사안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 지역발전의 길을 모색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 하지만 자신의 의견에 소신이 없는건지 아니면 글을 못쓰는 건지는 알수 없어도 머뭇거리며 지면에 실리는 것은 꺼려하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런 사례처럼 언론이란 것이 독자들의 가려운 곳, 궁금해 하는 곳을 잘 파악하고 알려주는 것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지만 막상 해보면 그게 그리 쉽지 않은 걱정거리다. 제보가 들어오면 열심히 취재한다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전화를 하거나 찾아가면 ‘할 이야기가 없다’거나 ‘나중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며 전화를 끊거나 질문조차 받지 않으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들어보면 술자리같은 사석에서는 누구를 막론하고 자유롭고 기탄없는 대화들이 오고간다. 그러나 약간의 공식적인 자리가 되면 사람들의 태도는 완전히 달라진다. 사회지도층에 있는 사람들도 오십보 백보다. 이야기를 시작할 때는 그 사안에 대해 적나라하게 비판을 하다가도 ‘기사화 해도 괜찮겠나’는 물음에는 그만 말끝을 흐린다. 기고문을 한번 써보면 어떻겠냐는 말에도 손사레를 친다. 한 이야기의 주제가 무엇이든 마찬가지다. 제일 심한 주제라면 아무래도 정치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태도는 사람의 처세술과 관련이 있음직해 보인다. 그렇더라도 소신에 찬 문제의식을 가졌던 사람이 갑작스런 침묵모드로 돌아 서는 것은 그 자체로 무능을 스스로 나타냄과 동시에 책임을 회피하는 자세다. 머리에 든 것은 있어 사석에서 백날 떠들어 봐야 그것이 지역사회 발전에 얼마나 도움이 될까. 그것은 차라리 권력자에게 고개 숙이고, 아부하는 동조자나 마찬가지다.
생각만 하는 문제의식으로는 세상이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 과거 역동적이고 격렬했던 우리 정치사의 중심에 있던, 지금은 고인이 된 김대중 전 대통령이 했다는 유명한 말 “행동하는 양심”에서처럼 진정으로 살기좋은 나라, 잘사는 지역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도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김 전 대통령의 표현처럼 방관하는 것, 즉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결국 악의 편이다. 결국 이기는 길은 공개적으로 옳은 소리로 비판하는 거다. 지는 길도 있다. 부당 하거나 내뜻에 반해도 ‘무섭다, 귀찮다, 내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고 말하지 않고 행동하지 않으면 된다. 그러나 보고만 있고, 눈치만 살피면 언제나 악이 승리한다는 사실만은 기억하자,
말도 해야 바뀐다. 좋으면 좋다고 하고 나쁘면 나쁘다고 분명하게 말해야 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좋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는 더 잘할 수 있을 것이고, 나쁘다고 말한데 대해서는 근본부터 다시 시작해 적절한 위기해법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소신껏 말하는 것이 갈등을 유발하거나, 원하는 것을 놓치는 이유가 되거나, 상대가 원하는 대답이 아닐 경우 살짝 움츠려 들기는 하겠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나쁜 평가를 받는걸 두려워해서, 또는 미운털 박혀 왕따로 고립되는게 두려워 우리 사회가 집단침묵 모드가 된다면 더 이상 발전은 기대하기가 어려워진다. 대한민국 역사 어디를 들춰봐도 밀실에서 그들만의 논리로 좋은 정책이 나왔다는 결과는 없다. 진지하게 열린 장에서 치열하게 토론하고 건강한 견제를 받을 때 비로소 옥동자가 나오는 법이다. 설령 그것이 옥동자가 아니어도 건전한 견제와 평가와 토론속에 옥동자로 만들어 가면 되기 때문이다.
말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해버리고 나면 속이 후련하다가도 뭔가 찝찝해지고, 어떤 때는 내가 하고 싶은 말 안하고 있으면 가슴이 답답하다가도 속으로는 안하길 잘했나 싶을 때가 있다. 상대가 위, 아래 상관없이 누구한테도 심한 말 퍼부어 놓고 후회를 할 때나, 불같이 못난 성격을 탓하며 이따금씩 느끼는 말에 대한 짧은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어쨌거나 생각하고 곱씹을수록 말이란 참 어렵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이해하고 솔직하게 대면하면서 서로에게 공감하는 것만큼 더 큰 소통의 비결은 없다. 할 말은 하고 사는 사회,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하고, 그런 의사표현을 폭넓게 수용할 수 있는 지역사회 분위기가 아쉽다. 백가쟁명은 아니더라도 하고 싶은 말은 해야한다. 하고 싶은 말을 참고 사는 사람, 언젠가는 참기 힘든 일을 겪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