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삼일절을 맞아 정환직 대장의 동생 정환봉 의사가 독립건국 유공자 대통령표창 서훈을 받았다는 소식을 접했다. 정환봉 의사는 열전28에서 소개했는데 산남창의지下74p, 산남의진유사533p에 기록되어 있다. 서훈의 등급이 낮은 아쉬움은 있으나 산남의진에 참진한 공로가 인정된 것은 다행이다. 이는 고손자(高孫子)인 정주화 님의 노력으로 이루어낸 결실로 아직 서훈을 받지 못한 산남의진 의사 후손들에게 좋은 사례가 될 것으로 생각된다. 법적으로 국가에 공로가 있는 분은 그 후손이 서훈을 신청하도록 되어 있으니 산남의진기념사업회에서는 자료 제공 등의 협조밖에 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따름이다김일원(金日元) 생존기간:1880~1910. 10.31. / 출생지:경북 영덕 / 운동계열:의병 / 훈격:독립장(1995) 공적내용 : 경북 영덕(盈德) 사람이다. 정환직(鄭煥直) 의진에 가담하여 경북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乙巳勒約)」을 체결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그들의 지배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행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과 친일주구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김일원은 이 같은 시기에 일경 처단 및 군수품 모집 등을 비롯한 반일 의병투쟁을 지속적으로 전개할 목적을 가지고 같은 해 정환직 의진에 들어가 경북 일대에서 활동하였다. 대한제국기 관찰사를 지내고 중추원 의관을 제수받은 정환직은 아들 정용기(鄭鏞基)가 의병장으로 활약하다가 일본군의 총탄에 맞아 순국하자 스스로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리하여 군대를 이끌고 수차례에 걸쳐 일본군과 항전하여 적들을 사살하는 한편 헌병 분파소 등을 습격 방화하는 등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다가 일본군에 피체되어 순국한 의병장이다. 이 같은 정환직 의진에 가담하여 활동하던 중 김일원은 동지 1백 수십 명과 함께 총과 칼을 휴대하고 1907년 10월 29일 경북 흥해군(興海郡) 읍내에 들어가 우편취급소를 습격하여 소장 일본인 시원위태랑(市原爲太郞) 등을 총검으로 처단하였다. 그리고 그곳에 보관한 3백여 원을 노획하고 근처에 있는 경무분파소 및 기타 13동의 집을 방화 소각시켰다. 그리고 그는 같은 해 11월 3일 신령군 읍내에 들어가 군청에서 총 1백 수십 정을 탈취하고 경무분파소 및 순검 박재진(朴在鎭)의 집을 소각하였다. 같은 달 4일에도 그는 의흥군(義興郡) 읍내에 들어가 경무분파소에서 총 수백 정을 탈취하고 분파소 및 순검 주택 3동을 소각시켰다. 15일경 다시 흥해군(興海郡) 읍내로 들어가 친일 순사들로부터 군자금을 징수하고, 이들을 총살 처단하였으며 아울러 군청과 기타 7동의 가옥을 소각시켰다. 같은 달 16일에는 청하군(淸河郡) 읍내에 들어가 순검 김학윤(金學潤)으로부터 군수품을 노획하는 등 다방면에 걸친 의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던 중 피체되어 1910년 10월 31일 대구공소원에서 교수형을 받아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註 · 독립운동사자료집(국가보훈처) 별집 제1집 523·52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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