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는 우리 사회에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사회적 거리두기에서 생활 속 거리두기로 정책이 바뀌면서 희망을 가졌는데 다시 혼란이다. 산남의진 순국선열을 위한 추모식과 백일장 사생대회도 예정되었던 5월 행사에서 10월로 연기한다. 보현산별빛축제를 찾는 어린이들과 젊은 학부모들에게 백일장 사생대회에 참가하여 산남의진 선열들의 정신을 일깨울 수 있도록 보현산별빛축제 기간 중인 10월10일 개최할 예정이다.이갑이(李甲伊) 생존기간: 미상~1908. 4.15 / 출생지: 미상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국장(1995) 공적내용: 의병으로 경북 흥해(興海) 일대에서 활약하였다.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고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일제는 1904년 러시아와의 전쟁 도발 직후 곧바로 우리 정부를 강박하여 「한일의정서」를 강제로 체결케 하고, 나아가 고문정치를 실시하였다. 이어 1905년 전쟁에서 승리하자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자주적 외교권을 강탈하는 한편 통감부를 설치하여 한국 식민지화 정책을 가속화시켰다. 더 나아가 1907년 헤이그 특사사건을 빌미로 광무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곧바로 군대해산을 강제하여 우리 민족의 무력을 박탈하였다. 이러한 국가존망의 위기에 직면하여 전국 각처에서는 의병이 속속 봉기하여 일본군을 축출하고, 친일 주구배들을 처단함으로써 국권회복을 달성하고자 하였다. 이갑이는 이러한 시기에 일본군을 축출할 목적으로 의병에 투신하여 활약하였다. 특히 그는 의병활동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한 비상수단으로 1908년 4월 13일 30여명의 동료 의병들과 함께 경북 흥해군 북안면(北安面) 수성동(守城洞) 등지에서 친일 동장 등에게 수차례에 걸쳐 군자금을 모집하였다. 그러나 이를 탐지한 대구경찰서 정찰대의 기습 사격을 받아 7명의 동료 의병들이 피살되고, 그는 15일 같은 군 파계면(把溪面) 내곡동(奈谷洞) 동장 집에 숨어 있다가 피체되었다. 이날 밤 그는 이미 피체되어 있던 조양동(趙良洞) · 차경수(車敬守) · 이주발(李周發) · 김수달(金守達) 등 4인과 더불어 포승을 절단하고 탈주를 기도하였다. 하지만 김수달만 성공하고 그를 비롯한 나머지 4인은 모두 피살,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 註·한국독립운동사자료(국사편찬위원회) 제10집 270∼272면 이규성(李圭成) 생존기간: 1870.2.8~1949.12.3 / 출생지: 경북 영일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족장(1990) 공적내용: 경북 영일(迎日) 사람이다. 1907년 음력 10월 정환직(鄭煥直) 의병장이 이끄는 삼남의진(三南義陣)에 들어가 경북 흥해(興海) 지역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 뒤 일제하에서도 의병활동을 계속 하다가 1912년경에 피체되었다. 그리하여 1912년 3월 4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징역 2년 6월형을 언도받고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獨立運動史資料集(國家報勳處) 別集 第1輯 548·549面 이대백(李大伯) 생존기간: 1879~미상 / 출생지: 경북 경주 / 운동계열: 의병 / 훈격: 애족장(2014) 공적내용: 1908년 음력 10월부터 1909년 11월까지 산남의진(山南義陣) 소속의 이석이의진(李石伊義陣)에 참여하여 경북 경주(慶州) · 청송(靑松) · 흥해(興海) 등지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의병장 이석이는 1906년 3월 경북 영천(永川)에서 정용기(鄭鏞基)가 조직한 산남의진에 참여하였다. 1907년 9월 초 영일군(迎日郡) 죽장면(竹長面) 입암전투(立巖戰鬪)에서 대장 정용기가 전사한 뒤 독자적으로 의진을 편성하였다. 이석이의진은 1907년 9월 이후부터 1909년 10월 2일 청송군 현동면(縣東面) 도평(道坪)에서 체포될 때까지 청하(淸河) · 영천(永川) · 청송 등지에서 군자금 모집과 친일파 처단 등의 활동을 하였다. 이대백은 이석이의진에서 1908년 10월 14, 15일경 이석이 등 의병 백 수십 명과 함께 총기를 휴대하고 청송군 원매동(元梅洞)에서 군자금을 모집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 1909년 10월 24일 영천경찰서 순사대에 체포되었다. 1910년 1월 17일 대구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강도죄로 징역 3년을 받았다. 정부는 고인의 공훈을 기려 2014년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註ㆍ判決文(大邱地方裁判所 : 1910. 1.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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