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 가운데 죄 없는 자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라"는 말은 성경에서 바리새인들이 간음한 막달라 마리아를 율법에 따라 돌로 치려할 때 예수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모두가 양심에 가책을 느껴 떠났고 오직 예수와 여자만 남았을 때 예수가 ‘나도 너를 벌하지 않을 것이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했다. 성자도 함부로 다른 이를 심판하지 않는다는 뜻이 포함된 말이다.
7월 중순이 시작되면서 우리는 두 가지의 죽음 앞에서 만만찮은 논란을 주고 받았다. 하나는 박원순 서울시장의 극단적인 선택으로 침통한 분위기 속에 그가 성추행 혐의로 피소된 사실이 거론되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친일 논란이 일고 있는 백선엽 장군의 대전현충원 안장을 두고 시대의 오욕이라는 목소리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의 대표적인 인권변호사였으며, 평소에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던 박 시장이 위력으로 한 여성에게 수년간 고통을 준 사실을 두고 세금을 투입해서 서울시 장(葬)으로 할 필요가 있느냐라는 문제제기를 했고 논란의 중심에 섰다. 또 6.25 전쟁때 낙동강 전투와 38선 돌파작전 등 결정적인 전투를 지휘하며 전선을 이끌어 벼랑끝의 나라를 구하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1953년 한국군 최초로 대장이 된 장군을 일제 식민지 치하때 간도특설대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는 등 친일반민족 행위를 했다는 이유로 군이 관리 주체인 동작동 국립현충원이 아니라 국가보훈처가 관리하는 대전현충원에 안장하는 문제를 두고도 씨끄러웠다. 분별없이 자행된 인격모독까지 있었다. 주로 진보와 보수로 쪼개진 민심이 진흙탕 싸움을 하는데 답답하기는 매한가지다. 참으로 슬픔을 넘어 아픈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대목에서 늘 ‘한국사람 하나는 일본인 3명을 이길 수 있지만, 한국사람 10명은 일본인 3명을 절대 못당한다’는 말의 뜻을 절감하고 이해한다.
이럴 경우 일반적인 사람들은 어떤 가치판단을 할까. 고인들이 사실 평소 얼마나 훌륭한 삶을 살아왔는지 보통 사람들은 다시금 확인하고 있다.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있다면 그건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지극히 인간적으로 태어난 사람이라면 긴 삶의 여정동안 작은 티끌, 또는 옥의 티 하나정도 없는 삶을 살 수가 없다는 말이다.
모든 죽음은 애석하고 슬프다. 더구나 고인들은 존경받을 만한 삶의 자취를 남겼다.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은 채 남겨진 문제 때문에 남은 사람들이 분열하고 충돌한다. 죄를 지으면 모두가 손가락질하며 ‘악인’이라 불러야 하는가. 우리가 통상 이야기하는 범죄는 모두 똑같은 범죄인가. 선과 악을 판단하는 ‘절대적 잣대’가 존재하는 것인가. 불교에서도 누군가를 비판하고자 할 때엔, 먼저 자신에 대해 냉정한 반성을 앞세우고, 자비심을 바탕에 깔 것을 요구한다. 그 상대도 본래는 부처라는 마음가짐과 상대의 잘못을 단죄하려 하기 보다는 오히려 상대에 대한 자비심을 베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은 권력과 돈을 손에 쥐면 죄지을 일이 많아진다고 본다. 위의 두 사례를 보면서, 아니 우리 주변에 수많은 유사한 경우를 보면서 ‘나는 그렇게 안 살았다’고 장담할 사람 있을까. 공직후보자 청문회도 숱하게 봐왔다. 내가 살아온 날들을 돌아본다. 숱한 거짓말에 불법과 실수, 배신 등 아마도 털면 온통 먼지 투성이라 청문회는 차치하고 우선 부끄러움 뿐이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스스로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타인에게 지나치게 엄한 경향이 있다. 그러나 냉정히 생각하면 오히려 자신에 대해 냉철한 반성이 앞서야 할 일이다. 대개 도덕성과 양심의 표준에 괴리가 크다. 내가 잘 지키지 못하는 도덕과 윤리를 남에게 강요하면 안된다. 상대방의 잘못을 단죄하려 하기 보다는 상대에 대한 자비심이 바탕에 깔려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툭하면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 세 대결을 벌이는 것이 이제 우리의 일상이 돼버렸다. 우리 중에 죄없는 사람 누구이며, 그들에게 돌 던질 수 있는 자 누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