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 주차장으로 차를 진입시켰다. 평일이라서 그런지 빈자리가 많이 보였다. 잠금 버턴을 누르고 깊게 공기를 빨아들였다. 낯익은 파도소리가 다투어 귓전에 머물렀다. 하늘과 바다가 한통속으로 익어가고 있었다. 왠지 낯선 시간 속에 도착한 느낌이 들었다. 그전에 다녀간 익숙함을 누르고 낯설게 다가오는 시간이 마중 나와 있었다. 바다의 저쪽과 땅의 이쪽을 확연하게 분리해 놓은 방파제 앞에서 말문을 잃었다. 거대한 자연의 위력 앞에서, 인간은 다만 숙연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다. 파도가 끊이지 않고, 바다 이야기를 실은 배가 드나들고, 하염없이 갈매기가 날고, 백사장이 나른하게 펼쳐져 있고, 바람이 머무는 곳에 수평선이 뒤척였다. 주차장 옆에는 돌문어상이 희화적으로 놓여 있었다. 바다색을 몸에 두른 문어 조형물을 보면서 잠시 식욕이 살아났다. 그녀에게 전화를 했다. “창원 터널입니다.” 그녀가 하르르 웃었다. 서로의 울타리가 그 웃음소리로 깔끔하게 걷혀진 것 같았다. “선생님 말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는 것 같네요. 혹시 포항에 오셨나요?” “엎어지면 코 닿는 호미곶 주차장까지, 나들이 했습니다.” “반전이네요. 선생님이 그전에 말씀하시지 않았나요. 자로 재는 자벌레처럼 움직이는 습성 때문에 좀체 기동성이 없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어머, 내 정신 좀 봐. 앞에 보이는 새천년 기념관 뒤편에 있어요. 상호는 작은 찻집이에요. 찾아오실 수 있죠? 혹시 못 찾으면 전화주세요.” 목소리가 더 밝아져 있어서 좋았다. 누구나 일어서는 법을 자신의 기준에 적합하게, 노력하는 것이 느껴졌다. 아내의 빈자리에 머물러있지 않고 또 다른 온기를 찾는 나와, 별거중인 남편을 잊고 곳곳에 여행 다니는 그녀가 그런 셈이다. 상처도 생기고 딱지도 앉고 마른 눈물도 흘리리라. 진종일 우울해 하거나 불안한 가슴도 달래겠지. 딱 그만큼에 훌훌 털고 일어나 밀린 빨래도 하고 음악 볼륨을 높일 것이다. 오늘처럼 수상한 시간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들어가는 기대감으로 들떠본다. 마주보고 서있는 왼손 동상 앞을 지나가면서 바다에 잠긴 오른손 동상을 번갈아 보았다. 아마 각자 떼어놓은 손의 조형물 아래로 내려가면 서로 북돋우며 다 같이 잘사는 염원이 깃들어져 있을 것 같았다. 작은 찻집은 연두색 출입구로 단아하게 꾸며져 있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그녀가 주방에서 나를 반겨주었다. 보조개가 들어간 미소가 눈부셨다. “먼 길 오셨네요.” 먼 길이 주는 늬앙스는 적어도 내게는 파격적이었다. 꼭 만나야 되는 사람이 이제야 만나는 아쉬움으로 읽혀졌다. 창가에 자리를 잡으면서 무심코 바다에 시선을 던졌다. 햇살이 밝아서 등대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내 시선을 따라가며 탁자에 엽차를 올려놓았다. “웬만한 날씨에도 보이지 않는 등대가 창문 속으로 들어왔네요. 선생님은 밝은 기운을 몰고 다니나 봐요. 호호.” 은은한 한약냄새가 풍기는 찻집 메뉴에서 단호박 양갱과 생강라떼를 주문했다. 가슴속 오래 멈추지 않을 두근거림이 출발신호에 따라 움직이는 것을 받아들였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