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래 없는 긴 장마 끝에 폭염에다 다시 코로나19가 극성이다. 그러나 이 또한 지나가리라.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이 자리에서 제각기 할 일을 해야 한다. 국권이 상실된 마당에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죽음으로 왜적과 싸웠던 선조들의 모습을 배우고 그 정신을 이어받아서 말이다.진중역사개요(陣中歷史槪要)제궁에서 밀지를 받다. [帝宮에서 密旨拜受]<산남창의지 11p)한양성 밖에는 매일 적의 대포소리가 진동하고 전국 각지의 인심이 물끓듯하니 구중궁궐은 적의 통감(統監) 아래에 놓여 군신(君臣)의 말과 행동의 자유가 없어졌다. 전 도찰사 정환직(鄭煥直)이 황제를 배알하니 고종이 슬픈 소리로 환직에게 이르기를, “경이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아는가? 짐망(朕望)이라”. 하였다. 2자(二字)로써 칙령하는 뜻이다. 환직은 눈물을 머금어 이를 받들고 물러났다. 화천(和泉)은 옛날 제경공(齊景公)이 각 제후국(諸侯國)의 군사에게 포위를 당하여 거의 사로잡히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차우장(車右將) 봉추부(逢丑父)가 급히 경공의 수레에 뛰어올라 자기 옷을 벗어 경공에게 주어 바꿔 입게 하고 경공은 말고삐를 잡고 수레의 바른 편에 서게 하였다. 이윽고 적장이 다가왔다. 이 때 추부가 고삐를 잡은 자에게 소리를 높여, “내가 목이 마르니 급히 화천(和泉)의 물을 떠 오라.” 하였다. 고삐를 잡은 경공은 이 틈을 타 포위에서 벗어날 수가 있었던 것인데, 우리 한말(韓末)에 이르러 적이 궁궐에 들어와 호시탐탐하여 국가의 막중한 책임을 이렇게 비유하게 되었음은 실로 슬픈 일이라 할 것이다.도찰사(都察使) 부자(父子)가 의논하다. [都察使父子議論]<산남창의지 11p>정환직은 큰 아들 용기(鏞基)를 불러 말하였다. “아비는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자 하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 용기가 울며 말하기를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아버지가 자식을 부리는 것은 의(義)로움의 처음이요, 나라가 있은 후에 반드시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그 뜻을 장하게 생각하고 허락하여 말하였다. “영남은 풍속이 충후(忠厚)하고 사족(士族)이 많이 거주하니 너는 영남으로 돌아가 사족을 모집하여 강릉으로 오게 하라. 나는 군인들에게서 듣기를 강화 및 남북산성에서 도산(逃散)할 때에 병자호란(1636년 12월~1637년 1월) 때 강화도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항복하면서 무기를 묻거나 민가에 숨긴 것을 말함 군기 등속을 혹은 흙구덩이에 묻고 혹은 민가에 숨겼다 하니, 이제 암암리에 이들을 불러 수집하여 서강(西江)에 감춰 두고 화약 등속은 외국인과 결탁하면 얻을 수 있으리라. 나는 그 동안에 준비하고 있다가 네가 경성에 오기를 기다려 황궁(皇宮)을 옹호하여 임금의 측근에 있는 악한 무리를 먼저 제거한 후에 격서를 천하에 전하면 일이 족히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용기가 한참 생각한 끝에 말하기를, “그는 실로 어려운 일입니다. 비록 영남이 비록 충후한 풍속이 많으나 국가의 태평한 날이 오래여서 나라의 선비들은 무술을 익히지 않고 유약하니, 이 일은 유약한 선비가 능히 할 바가 못 됩니다. 무기를 모으는 일도 그러합니다. 혹 경성에서 무기를 얻는다 할지라도 진흙투성이가 된 곳이 많으니 반드시 완전한 것이 없을 것이니 천인천심(千人千心)인 이곳에서는 수리할 곳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군사를 일으키고 무기를 수집하는 모든 일이 경성이 영남만 못합니다.” 하였다. “그러면 영남에 가서는 어느 방도를 취하겠느냐?” 고 아버지는 물으니 용기가 대답하기를 “산 밑에 엽수(獵手)가 많으니 먼저 엽수들 모으면 엽총을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후에 여러 고을의 것을 취득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그렇다면 남선(南鮮)의 적을 소탕한 후에 상경하려느냐?” 용기가 답하기를 “부산은 왜적들의 인후(咽喉)입니다. 대구 등지에서는 전국의 힘을 합할지라도 세가 오래 지탱하지 못할 것이니, 만일 1천 명의 군사를 얻으면 싸우며 달아나고 또 싸우다 달아나면 적은 유산(流散)하는 것으로 얕볼 터이니, 그 틈을 타 관동(關東)으로 들어가면 적이 더욱 아군의 미약함을 보고 반드시 대군을 거느리고 오지는 않을 것이요, 만일 대군을 몰고 오더라도 우리에게는 천험(天險)의 이(利)가 있으니 그런 대로 관동을 벗어나 경성에 진을 치고 황궁 지척 밑에서 성을 등지고 일전을 벌인다면 거의 우리 임금의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아버지는 “나도 또한 한 달 후에 남하(南下)하려 하니 그리 알라.” 하고 드디어 용기를 영남으로 보냈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