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수 지수와 병와는 동시대를 살았던 학자로서 직접 만나거나 혹은 서신을 통하여 사상과 문학을 토론하였다.1) 이러한 교분으로 인하여 세 사람은 자신의 근거지에 구곡원림을 설정하고 경영하여 주자의 삶을 자신들의 거처에서 실현하였다. 횡계천과 금호강은 모두 수량이 풍부하여 배를 띄울 수 있었다. 문집의 기록을 살펴보면 훈수와 지수는 횡계에 배를 띄우고 그 흥취를 시로 읊었다.2) 금호강은 상류에 댐이 생기기 전에는 수량이 풍부해서 짐을 실은 배가 오고 갔다. 횡계천과 금호강의 이러한 조건은 주자의 무이구곡을 실현하는 데 큰 문제가 없었다. 산과 내가 어우러진 공간에 구곡을 설정하고 배를 타고 아홉 굽이를 거슬러 오르는 행위는 단순히 주자의 풍류를 모방하여 여흥을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주자의 도학적 삶을 자신의 은거지에 직접 실현하여 영천을 성리가 구현되는 땅으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제2절 횡계구곡橫溪九曲횡계구곡은 조선 후기 학자인 정만양, 정규양 형제가 경영한 구곡원림이다. 정만양은 본관이 연일延日, 자가 경순景醇, 호가 훈수塤叟이며, 정규양은 자가 숙향叔向, 호가 지수篪叟이다. 훈수와 지수 형제는 영천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생원 정석주鄭碩胄이고 어머니는 의성 김씨 김방렬金邦烈의 따님이다. 종조부 학암鶴巖 정시연鄭時衍(1632~1687)과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1627~1704)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는데 주로 학암에게 공부를 하였고 갈암의 학문을 듣고 사모한 나머지 찾아가 배알하였으며 이후 서한을 통하여 여러 차례 성리학과 예론에 대하여 질의를 하였으나3) 갈암의 죽음으로 오래 지속되지 못하였다.훈수와 지수는 영남 사림으로 퇴계학을 존숭하였지만 당색에 구애받지 않고 뛰어난 여러 학자들과 허물 없는 교유를 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이 윤증尹拯(1629~1714) 정제두鄭齊斗(1649~1736) 정시한丁時翰(1625~ 1707) 이형상李衡祥(1653~1733) 등이다. 당시 충청도에 은거하고 있던 소론의 영수인 윤증과 서신을 교환하며 학문의 세계를 교유하였다. 훈수와 지수는 자신들이 쓴 책을 보내서 질정을 부탁하기도 하였는데, 이 교유는 윤증의 서제庶弟인 윤졸尹拙이 장수찰방長水察訪으로 근무할 때 영천에 있는 훈수와 지수를 방문한 것이 계기가 되어 이루어졌다.4) 훈수와 지수는 정제두와 동종同宗으로 당파를 떠나 서로 교유하였는데, 정제두는 훈수와 지수를 한결같이 종인宗人이라 일컬으며 훈수의 죽음을 슬퍼하는 만사를 짓기도 하였다.5)
-계속
각주)1) “庚辰 甁窩李公衡祥 自慶州任所 解歸寓居于郡城之南 躬訪先生兄弟于大田廬次 其後陸續書問 先生與之講辨義理 反覆不已” 󰡔塤篪兩先生文集󰡕 「篪叟先生文集附錄」 <遺事>2) 󰡔塤篪兩先生文集󰡕 卷1 「詩」 <重陽 與諸益 汎舟紅流潭>3) “聞存齋李先生之風而慕之 仍拜葛老於南岳錦陽間 雖不執經 頻以書質問” 󰡔塤篪兩先生文集󰡕 卷29 「先兄塤叟先生行狀」4) “冬先生致書于明齋尹公 先是 先生聞尹公隱居不仕 學術精深 心竊夥之 至是 尹公之庶弟拙 以長水督郵 來訪先生兄弟于橫溪 蓋以渠在家時 飽聞兩先生盛名故也” 󰡔塤篪兩先生文集󰡕 「篪叟先生文集附錄」 <遺事>5) 󰡔霞谷集󰡕 卷3 「書」 <答橫溪宗人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