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해가 다시 저물어간다. 달랑거리며 걸려있는 한 장의 달력을 보고 있자니 세월의 무상(無常)을 거듭 체감한다. 다시 늘어나고 있는 코로나19 환자 뉴스로 세상이 더욱 움츠러든다. 1년을 이리 허망하게 보내야 한다는 것이 꿈속의 일과 같다. 이달이 지나면서 한해를 갈무리할 때쯤이면 새해의 희망을 노래할 수 있으면 좋겠다.이세기 왜의 병청에서 적의 우두머리를 꾸짖다 <산남창의지 29p> 이세기는 의진에 참진한 이래로 처음부터 최후까지 용감하게 활약하여 옛날 영웅에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동지들은 점점 전사하거나 흩어지고 세상인심은 차차 바뀌어서 제갈 양의 죽음을 백성이 사마의(司馬懿)에게 달려가 고하였듯이 조선인으로서 세기를 후원하는 자가 없으니 운명이라 탄식할 따름이다.세기가 마침내 왜적에게 잡혔는데 왜적이 우두머리가 말하기를, “너는 다른 사람의 재물을 약탈하고 사람의 생명을 수없이 죽였으니 그야말로 도적이 아니냐?” 세기가 대답하되, “우리 동포의 재물을 먹고 제 원수의 생명을 죽이는 것이 도적이라 한다면, 남의 나라를 뺏고 남의 나라의 인종을 멸하는 자들은 무슨 도적이라 하느냐? 이세기가 왜놈을 죽이고 왜놈이 이세기를 죽이려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바거늘 무슨 잔말을 하느냐?” 하면서 깔고 앉은 의자를 들어 왜의 우두머리를 쳐서 꺼꾸러뜨리고 드디어 죽음을 당하였다.여협사(女俠士)가 오빠의 시체를 봉환하다 <산남창의지 30p> 청송 김석수(金碩秀)의 처 이씨는 세기의 누이동생이다. 세기가 체포당하자 이씨는 세기의 뒤를 좇았는데, 세기가 굴하지 않고 죽으니 염습하고 돌아가 선영의 아래에 안장하였다. 청송(靑松) 향당(鄕黨)의 의기 <산남창의지 30p> 영남 청송은 경성에서 거리가 1천리인데, 권세있는 벼슬이나 세습되는 작위를 받은 이는 비록 없으나 주서노사(周書魯史)1)를 대대로 읽어 10명이 사는 작은 동네에도 반드시 충신이 있는 고을이다. 국권을 잃어버린 뒤로부터 고을 내 주요인사들이 앞다투어 산남의진(山南義陣)에 입진하여 성심을 다해 종군하였다. 그러던 차 영덕의 패전 소식이 청송에 전해지자 군내 사림(士林)이 분연히 궐기하여 머리를 싸매고는 맨발로 손에 무기를 잡고 용감하게 전쟁에 나갔다.서종락(徐鍾洛)·남석구(南錫球)가 장수가 되어 진을 동서로 나누니 동은 서종락이요, 서는 남석구가 담당하였다. 동서가 서로 호응하고 한편으로는 최세한의 본대와 기각지세를 만들어 수년간에 걸쳐 적과 항전하다가 고와실(高臥室)2) 싸움에서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일의 성패는 국운에 부치려니와 조그마한 청송이 가히 동주(東周)의 7읍3)에 비길 만하다. 우재룡(禹在龍)의 뒷이야기 <산남창의지 31p> 대한제국 말년에 기인(奇人)이 한 사람 있었는데 우재룡이 바로 그다. 이 사람이 글은 이교(圯橋)4)의 전수를 받지 않았고, 지위도 한나라의 재상으로 봉함을 받지 못했으나 지키는 바의 정의는 장량(張良)을 따랐다.처음에는 적개심으로 남영(南營)의 병정이 되었다가 군대가 해산을 당하자 적이 준 작위를 침 뱉듯이 버리고 의진에 입진하였다. 이미 꺼꾸러진 형세를 만회하고자 동엄(東广)정환직 선생과 단오(丹吾) 정용기 부자를 돕다가 두 대장이 다 순절하니 “나무 하나가 기울어지려는 큰 집을 지탱하기 어렵다.” 하고 탄식하였다. 다시 뜻을 가다듬어 널리 동지를 구하여 대사를 도모코자 하다가 발각되어 수년의 금고를 겪고 나왔다. 다시 수백 동지를 규합하여 ‘광복회’를 조직하고 천인(天人)이 공노할 국내 반역의 대죄를 참(斬)하고, 큰 자금을 모집하여 나라 밖에 사관학교를 설립하여 학도 만여 명을 양성하고 무장 준비 중에 또다시 적에게 잡혔다.재룡이 적에게 소리쳐 꾸짖기를, “나는 이전에 남선 의병대장을 지낸 정용기의 의제(義弟)니라.” 자칭하였으므로 다시 10여 년의 금고형을 치르고 나왔다.각주) 1) 주서(周書) - ①상서(尙書), 곧 서경(書經) 중의 태서(泰書)에서 진서(秦書)까지의 32편의 일컬음. ②북주(北周)의 사서(史書)로, 당(唐) 태종의 명으로 위징(魏徵)의 총괄 아래 영호덕분(令狐德棻)이 지은 것. 노사(魯史) - 공자의 고국인 노나라의 역사2) 고와실(高臥室) - 1910년 서종락이 이끄는 의병이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 붙잡혀 총살당한 곳. 경북 청송군 안덕면 고와리 계곡에 있는 백석탄(白石灘)을 이른다. <독립기념관 국내 독립운동․국가수호 사적지>자료 발췌3) 동주(東周) 7읍 – 동주가 멸망하기 전에 끝까지 남은 7개의 읍(邑)4) 중국 장쑤성(江蘇省)에 있던 흙다리.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으로부터 태공(太公)의 병법(兵法)을 전수받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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