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명소인 충효재와 묘역을 역사문화유산 기반의 관광인프라 및 콘텐츠를 개발하여 역사적 성지, 근대역사 유적지, 인문정신문화 명소의 기능이 공존하는 복합역사문화 공간으로 발전시키고 일반인에게 그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안내하도록 추진하는 것이 필요하다.또한, 충효재의 의미를 살려 마을 명과 도로명을 충효마을, 충효길로 바꾸는 등 주민의 참여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에 역사적 가치와 지역의 관심이 공존하여 상생하는 지역발전 모델로서의 가능성이 있는 지역이다.산남의진의 역사는 그 자체로 서사의 형태를 띠고 있어 이것을 현대적 관점과 방식으로 재해석하여 스토리로 가공했을 때 새로운 문화관광상품의 가능성이 있어 향후 산남의진과 관련된 스토리텔링의 개발로 그 의미의 극대화를 기대할 수 있다.따라서 역사문화유산의 보존, 관광인프라의 구축 및 콘텐츠 개발, 영천시뿐 아니라 산남지역을 연계한 발전계획 수립을 통해 충효재와 묘역을 포함한 충효마을을 역사문화관광명소로 조성하고 이를 통해 산남의진의 체계적인 연구를 추진할 필요가 있다.”학술대회 발제자 중의 한 분인 이정섭 박사님의 발제 서문이다. 우리가 할 일이다.
불평 인사 등의 만주 피난 <산남창의지 31p> 적의 가혹한 정치는 아무 죄가 없는 평민에게도 참혹한 피해가 극심한 터인데, 하물며 저들이 혐의를 둔 사람들에게 있어서야 어떠했겠는가. 한번이라도 나아가고 물러남의 움직임에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저들이 싫어하는 인물에 대한 귀책(鬼策)이었다.
쇠하여 형편없이 몰락되기도 하고 압박에 의한 고통을 견디다 못한 많은 인사들은 고구려 때 조상의 개척지인 만주 방면으로 피난하여 국외에서 활동하는 동지들을 보좌하며 겨우 잔명을 보존하였으니, 만주 광야와 울창한 삼림 속에서 은은하게 들려오는 총소리는 삼천리 강산의 독립을 경영하는 의병들의 후신이었다.
참동계(叅同楔)의 시종(始終) <산남창의지 32p> 병인1) 3월에 정순기·정내의(鄭來儀)는 높은 산 흐르는 물에 생애를 의지하고 흰구름처럼 떠돌다가 곡강(曲江)2)의 한 구석에서 창랑지가(滄浪之歌:큰 바다의 푸른 물결을 노래함)를 부르며 세월을 보내고 있는 조성목(趙性穆)을 찾아갔다.서로 간에 길게 탄식하고 안부를 묻는 문답을 하고 나서 객(客)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跋涉湖嶺身無依(발섭호영신무의) 영호남 땅 두루 돌았으나 몸 둘 곳이 없으니千驚萬恐悽復悲(천경만공처부비) 갖가지 놀랍고 애끓는 마음 처량하고도 슬프네寂寞江山春復到(적막강산춘부도) 적막한 이 강산에도 봄은 다시 찾아왔건만忠魂義魄有誰慰(충혼의백유수위) 충의에 가신 님들의 혼백을 그 누가 위로하리오주인이 추연히 정색하여 말하기를 “그대의 말이 나의 뜻을 알아주는구려. 만일 여러 공(公)3)의 일을 표창함이 없으면 이것은 모두 우리들의 죄라.” 하였다.
침묵이 흐르는 좌중에서 참동계(參同楔)의 말이 나오게 되었다. 글을 지어 전파하니 뜻있는 사람은 실로 좋은 소식이라 기뻐하여 은연 증에 경상도 일대에서 비밀리에 연결선이 만들어졌다. 착착 진행되는 중에 일마(一魔)가 뒤따르니 이는 역시 운명이랄 수밖에.계원 중의 한 사람이 밖으로는 계에 참여한다 속이고 안으로는 계의 내력을 염탐하여 대구 도경찰부에 밀고하니, 적은 빠른 번개, 달리는 바람처럼 경상도 각 군을 망라하여 계원을 체포하였다. 그 기미를 알아챈 정순기는 계의 문서들을 불 속에 집어던지고 망명하고, 정내의·조성목·정호용(鄭琥鎔) 등은 동시에 체포당하여 경주 검사국에 체수되고, 적은 연루를 찾기에 혈안이 되어 왕복한 서신과 여러 가지 문서를 압수하는 등 물샐틈없는 수사를 하였으나, 결국 계의 문서가 드러나지 않으니 드디어 석방되었으나 참동계는 중도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각주)
1) 병인(丙寅) - 서기 1926년2) 곡강(曲江) - 흥해군(지금의 경북 포항시 흥해읍·기계면·신광면)의 옛 별호
3) 제공(諸公) - 산남의진에 참진하여 순절한 의사들을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