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형상이 경주의 임소에서 돌아와 군성郡城 남쪽에 우거하였을 때, 몸소 훈수와 지수를 대전리 집으로 방문하였고, 그 뒤로 끊임없이 서신으로 의리를 강구하고 분변하였다. 이렇듯 훈수와 지수는 폭넓은 교유를 통해 학문에 정진하여 경사經史는 물론 여러 분야에 두루 정통하니 당시 사람들이 중국 송나라 정호程顥 정이程頤 형제와 같다고 하였다.훈수와 지수는 벼슬을 하지 않았다. 그 당시는 노론이 집권하고 있는 시대였기 때문에 남인이 벼슬을 하는 것은 어려웠다. 이러한 현실에서 영남 남인은 현실대응을 달리 하였는데, 노론에 협조하여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부류가 있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부조리한 사회를 뒤집기 위하여 정변을 꾀하는 부류가 있는가 하면, 핍박을 참고 견뎌 일신을 보존하며 향촌사회에 은거하는 부류가 있었다.6)훈수와 지수는 향촌사회에 은거하며 학문에 침잠하는 길을 택하였다. 따라서 훈수와 지수는 벼슬에 나아가는 것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적극성을 가지지도 않았다. 정만양은 순릉참봉順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정규양은 아예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았다.世路風波也未知 세로의 풍파를 또 알지 못하니 一區林壑偶棲遲 한 구역 임학에 우연히 깃드네溪頭有石堪垂釣 시냇가 돌이 있어 낚시대 드리우고雲外多山謾詠詩 구름 밖 산이 많아 시를 읊조리네時到寺樓僧語軟 때로 절의 누대 이르니 승려 말이 부드럽고每傾茶碗病軀宜 매번 차 주발 기울이니 병든 몸에 마땅하네晴窓更對書千卷 날씨 개 창문에서 많은 책을 다시 대하니太古胸襟在伏羲 태고의 흉금은 복희에 있어라7)이 시는 훈수와 지수의 마음을 숨김없이 드러낸 시이다. 그들은 세상의 풍파를 알지 못해 숲으로 덮인 골짜기에 깃들어 산다고 하였다. 세상의 풍파를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풍파를 잘 알았기 때문에 외면한 것이다. 노론이 집권하는 시대에 남인이 가지는 한계를 알았기 때문에 향촌에 은거하는 삶이 가장 바람직한 처세라는 것을 훈지 형제는 잘 알고 있었다.훈수와 지수는 시내에 낚싯대를 드리우고 산 속에서 시를 읊조리며 한가한 삶을 살았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절을 찾아 승려와 찻잔을 기울이고 밝은 창문에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이러한 삶에서 훈수와 지수는 태고적 복희가 가졌던 마음을 가질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그러나 훈지 형제는 세상과 단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세상의 형세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이 일어났다. 이 난은 영조의 즉위에 불만을 품은 소론과 남인의 급진파들이 주도하여 정권 탈취를 목적으로 일으킨 정변이었다.8) 훈수와 지수는 이 난의 부당함을 간파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의병 수백 명을 모았다.이때에 정규양은 62세의 나이로 영천 사림의 추대를 받아서 의병장이 되었는데 이는 훈지 형제가 지녔던 높은 명망으로 인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규율을 갖춘 군대를 조직하여 출동을 준비하였는데 관군이 난을 평정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해산하였다.9)이인좌의 난에서 보여준 훈수와 지수의 현실대응은 훈수와 지수의 삶이 현실과 단절된 은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정통성을 중시하는 유자의 삶을 추구한 은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훈수와 지수는 후진 양성에 자신의 삶을 바쳤다. 이남산尼南山 아래에 옥간정玉磵亭, 육유재六有齋, 태고와太古窩, 진수재進修齋 등을 짓고 향단香檀과 청죽靑竹을 심어서 아름다운 경관을 만들고 그 속에서 후진을 양성하는 데 전념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걸출한 인재를 양성하는 결과를 가져왔다.훈수와 지수의 문인은 󰡔동문록同門錄󰡕에 등재된 111인을 비롯하여 추가로 첨기된 61인을 합하면 모두 172인이다.10) 따라서 훈수와 지수는 이현일의 사후에 “북의 밀암, 남의 훈수”라는 말이 언급될 정도로 당대에는 이재李栽와 함께 갈암 학맥을 양분하며 영남 유림을 영도하는 위치에 올랐다. 그의 대표적인 문인으로는 참의 정중기鄭重器, 승지 안경설安景說, 승지 조석룡趙錫龍, 장령 권응규權應奎 등을 들 수 있다.훈수와 지수는 이황李滉의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을 사상적 핵심으로 삼았다. 따라서 이理는 본연本然이고 기氣는 성절性節이니 이는 곧 ‘주主’이고 기는 곧 ‘자資’라 정의하였다. 이러한 학설은 이황의 주리론에서 벗어나지 않고 청대淸臺 권상일權相一에서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에 이르는 학자들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다. 그러나 훈수와 지수의 학설 중에 퇴계의 학설과 다른 점이 있다. 예를 들면, 훈수와 지수는 ‘양기養氣’를 주장한 것이다.학문을 하는데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질을 변화하는 데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단지 종이 위의 말 일 뿐이다.11) 조선시대 성리학에서 전통적으로 주리파는 ‘천리踐理’를 중시하고 주기파는 ‘양기養氣’를 중시하였다. 퇴계는 사람의 몸은 이기를 겸하는데 이는 귀하고 기는 천하니 이를 실천하면 기를 기르는 일은 그 가운데 있다12)는 말로 ‘천리’를 주장하였다.이에 반해 율곡은 호연지기가 천지에 가득 차면 본래 선한 이가 조금도 가리워짐이 없으니 맹자의 기를 기르는 논의가 성문聖門에 공이 있는 까닭이다13) 하여 ‘양기’를 주장하였다. 훈수와 지수는 율곡을 중심으로 하는 기호 사림의 주장을 수용한 듯하다.훈지 형제는 영남 남인계의 학자이면서 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자유롭게 학문 활동을 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학문의 진폭을 넓혔고 사고의 확장을 가져왔다. 따라서 주리론의 입장에서 주기론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데 주저하지 않았다. 훈수와 지수의 「횡계구곡시」는 이런 학문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훈수와 지수가 언제 횡계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횡계구곡에 태고와와 옥간정이 들어가는 것으로 보아서 이 건물들이 지어진 이후에 설정된 것으로 보인다. 태고와는 지수 선생 나이 35세(1701)에 지었고 옥간정은 50세(1716)에 지었다.그렇다면 횡계구곡은 선생의 나이 50세 이후에 설정된 구곡원림이라 할 수 있다. 지수는 35세에 횡계의 경치를 사랑하여 대전리의 집을 옮겨 횡계에 거처를 정하였다. 먼저 와룡암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육유재六有齋라 편액하였는데 시내의 이름이 장횡거張橫渠와 가깝기 때문에 횡거 선생이 남긴 말을 취하여 스스로 경계하려는 것이었다.14)지수 선생 나이 40세(1706)에 훈수가 가족을 이끌고 횡계로 찾아와 지수와 작은 집에서 함께 거처하면서 강론을 하였는데 간혹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낚시를 하며 서로 즐거운 삶을 영위하였다.15) 횡계구곡橫溪九曲은 경상북도 영천시 화북면 횡계리 횡계를 따라서 설정된 구곡원림이다. 횡계는 보현산에서 연원된 시내로 물이 맑고 수량이 풍부하였다. 지금은 횡계 상류에 횡계저수지가 만들어져 농업용수로 사용하기 때문에 시냇물이 많이 흐르지 않는다. 각주) 6) 禹仁秀, ‘塤ㆍ篪叟 鄭萬陽ㆍ葵陽 형제의 시대와 그들의 현실 대응’, 동방한문학 28, 2005, 47면. 7) 󰡔塤篪兩先生文集󰡕 卷1 「詩」 <述懷> 8) 禹仁秀, 위의 논문, 60면. 9) “戊申 盜起 蔓延湖嶺 侵掠畿甸 先生與篪叟先生 卽騎牛出山 到郡召募 郡之章甫 團束部伍 畵定方略 將赴敵一死 會難定罷歸” 󰡔塤篪兩先生文集󰡕 「篪叟先生文集附錄」 <言行錄> 10) 󰡔同門錄󰡕, 훈지향선생문집중간소 영인본, 1987. 11) “爲學第一事 在變化氣質 不然 只是紙上說” 󰡔塤篪兩先生續集󰡕 卷1 「困知錄內篇」 12) “理氣兼備 理貴氣賤 然理無爲而氣有欲 故主於踐理者 養氣在其中 聖賢是也” 󰡔退溪先生文集󰡕 卷12 「書」 <與朴澤之> 13) “浩然之氣 充塞天地 則本善之理 無少掩蔽 此孟子養氣之論 所以有功於聖門也” 󰡔栗谷全書󰡕 권10 「書」 <答成浩原>14) “辛巳秋 始闋制 先生愛橫溪水石之勝 遂移家卜居 先構小齋於臥龍巖上 扁之以六有 蓋以溪名近於橫渠 故取張先生遺語以自警也” 󰡔塤篪兩先生文集󰡕 「篪叟先生文集附錄」 <遺事> 15) “丙戌春 塤叟先生 挈家累來會 先生同處一小齋 相對看書 講論旨義 或携琴互彈 或把竿同釣 怡怡焉相樂” 󰡔塤篪兩先生文集󰡕 「篪叟先生文集附錄」 <遺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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