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은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이라 했던가바삐 흐르는 시간이 아까워 나는 자주 걷는다,철학자 플랑크린은 인간은 외로운 척 하며 걷고,끝없는 생의 위로를 받기 위해 걷는 거라고,그 해 겨울, 지리산 종줏길을 걷다 폭설을 만나 낯선 암자에서 하룻밤 신세를 진적이 있었다. 눈은 점점 거세게 퍼붓고 눈바람에 산은 깊어가고 더 차가웠다. 인적 없는 산중에도 사람 다니는 곳엔 눈발도 알아서 길을 터는 걸까.졸졸졸 개울 물소리 들리는 경사진 언덕위에 자리한 낯선 암자에 들어서니 마침 나이드신 보살 한 분이 아궁이에 불을 지피다 말고 힐끔 나를 처다 보시더니 선뜻 비좁은 부엌 공간을 밀치며 내준다.한동안 아무말 없이 아궁이 불만 처다 보다 젖은 바짓가랭이에 김이 모닥모닥 퍼질때쯤 보살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공불 쬔 것도 황송한데 잠 까지 재워 주신다는 말씀에 부처가 이 분인가 싶었다. 아궁이 불 때문에 달구어진 안면 홍조를 삭이며 조심스레 나도 한 마디 했다.여기 오는 등산객은 누구나 다 재워 주십니까? 항변하듯 보살 할머니가 또 한마디 하신다.“거참. 사람 봐 가매 재우지. 오는 사람 다 잴 수가 있남. 방도 작은 디” “처사는 귀가 참 잘 생겼어, 공 많이 들어 키운 관상 이랑께. 난 척 보면 알지.”“내가 요즘 바다가 무척 보고 싶어.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 아직 몰라 여태 바다를 본 일이 있어야제. 이 산중에만 쭈욱 살았슨께.”동문서답하듯 물으셨다. 이 산중에서 갑자기 왠 바다를 보고 싶다고 하실까. 새벽, 목탁 소리에 눈을 뜨니 소복소복 댓돌위에 눈이 가득하다. 눈발이 휘날리는 이 호젓한 암자에서 묵은 하룻밤 보시가 황공스러웠다. 타박타박 타닥타닥 아궁이 불소리, 사록사록 구상나무에 눈 쌓이는 소리를 나는 수십 번은 더 듣고 잠들었을 거다.한 평생 방랑기가 많아 전생에 지은 죄도 많은 내가 이런 깊은 암자에서 호사를 누리다니. 그리고 처음 본 나에게 왜 바다가 보고 싶다고 했을까. 바다 같이 넓은 마음으로 이제 철들며 살라는 충고는 아닐까. 아니 내 삶의 흔적 전부를 저 보살이 꿰뚫고 있는 듯 두렵기도 하였다.서둘러 한마디 인사라도 해야 내 맘이 편할 듯해서 보살 할머니가 거쳐하는 공양방 앞에 서니 낡은 액자 하나가 흙벽에 삐딱히 흔들거리며 붙어 있었다.“露積成海, “廳雪看書”(이슬을 모아 바다를 이루 듯 눈소리를 들으며 간간히 책을 본다)속가의 누군가가 선물로 받은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주어온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한 참을 쳐다 보고 있으니 보살님이 한마디 하셨다. 응, 저거, 우리 스님이 쓰신 거여. 요새 귀가 아파 어제 병원에 가셨는데 좀 있으면 올라 오실거야.필체에서 느껴지는 경건함과 편안함이 이곳 암자와 잘 어울리는 듯 했다. 겨울 삼동 깊은 밤 싸락싸락 눈소리 들으며 불경 읽는 여승의 모습을 상상하며 새벽 산길을 내려오니 저 만치 능선 아래로 아침 밥 짓는 연기가 반갑고 따스했다.한참을 걸었을까 노랑색 택시 한 대가 마을 입구에 멈추더니 여스님 한분이 촘촘히 내리셨다. 찻길이 여기 까진가 보다. 기력이 허약한 여스님 한분이 내가 내려 온 그 길로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순간, 어제 밤 나를 재워준 그 보살 할머니와 너무 닮아 한 참을 바라 보았다. 빡빡머리에 동그란 머리통, 짙은 속 눈썹, 그리고 작은 키에 작은 신발까지.아 ~~ 그래, 귀가 아파 그제 병원 가셨다는 그 스님이 저 분이 인가보다. 지리산 노고단길 어느 암자에 쌍둥이 자매스님이 기거하신다는 소문을 한 번 들은 적이 있긴 하다. 동생은 공양보살, 언니는 여승, 얼떨결에 합장 인사라도 못하고 생각없이 내려온 내가 부끄러웠다. 나무관세음 보살.오늘 아침, 겨울이 깊어가는 회색빛 조양천 골목길에 누가 생각없이 버린걸까. 테두리 깨진 액자 하나가 찬 바람에 뒹굴고 있었다.“廳雪看書 露積成海”몇 해 전, 지리산 암자에서 만남 쌍둥이 여스님의 잔영이 머리를 쓰쳐간다.“처사는 귀가 참 잘 생겼어, 공 많이 들어 키운 관상 이랑께.” 라고 하신 그 보살님을 찾아 내일쯤은 집을 나설 것 같다. 정처없는 시간속으로 겨울이 지나가는 길목, 나이 망칠望七의 짧은 하루 해는 흘러가는 걸까 지나가는 걸까. 왠지 오늘쯤 한 바탕 눈이라도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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