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곡 공암孔巖횡계구곡 제2곡은 공암孔巖이다. 공암은 제1곡 쌍계雙溪에서 횡계를 따라 약 600m 정도 올라간 지점에 있다.시냇가의 바위가 구멍이 많이 나서 공암이라 이름한다. 전설에 의하면 공암 안에 살고 있는 이무기가 이 바위의 구멍을 통하여 산 너머 흐르는 옥계를 오갔다고 한다.공암 앞에 솟아있는 산이 이남산尼南山인데 이 산에는 지수 정규양 선생의 아들과 손자의 산소가 있다.횡계 옆으로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공암을 많이 훼손하여 지금은 공암이 높지 않다. 그러나 도로를 내기 전에는 공암이 높이 솟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고 한다.현재의 도로가 나기 전에는 맞은편 횡계 들판 위로 길이 났다. 훈수와 지수는 이 길을 오고가며 횡계구곡 제2곡의 아름다운 경관을 감상하였다.그런데 훈수와 지수의 문집을 살펴보면 공암에 대한 생각을 달리 할 수 있는 시가 나온다. 마을 사람들은 공암을 구멍이 난 바위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지 않다. 훈수 지수가 지은 시 <아니산阿尼山>을 보면 공암은 공자 바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尼山萬古立 니산은 만고에 우뚝한데其下孔巖存 그 아래 공암이 있네後學徒瞻仰 후학이 다만 우러러보기만 하고還嗟未及門 도리어 문하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하네19)훈수와 지수는 니산은 만고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고 니산 아래에 공암이 있다고 하였다.여기서 니산은 아니산이다. 산의 이름을 아니산이라 한 것은 공자산이라는 의미이다. 공자는 중국 산동성 곡부시 니구산 아래서 태어났다. 니구산을 모방하여 아니산이라 명명하였다면 그 아래에 공암은 공자 바위라는 의미이다.훈수와 지수는 이 굽이를 횡계구곡 제2곡으로 설정하였다. 훈지 형제는 후학들이 이 공암을 우러러보고 문하에 미치지 못함을 탄식한다 하였다.횡계구곡에서 공암은 단순한 바위가 아니었다. 학문에 정진하는 후학들이 이 바위를 바라보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후학들이 하는 공부가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스스로 자신을 돌아보고 채찍질하였다. 공자의 형상을 두고서 항상 경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볼 수 있다.二曲潺湲列數峯 이곡이라 잔잔한 물 여러 봉우리 벌여 있고孔巖巖色別修容 공암의 바위 빛이 달리 의연한 모습이네山腰路卦添幽絶 산허리 길이 걸려 그윽하고 빼어난데回首人間隔幾重 인간 세상 돌아보니 몇 겹이나 막혔네20)훈수와 지수는 횡계구곡 제2곡에 이르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앞에는 잔잔한 물이 흐르고 그 뒤에는 여러 봉우리가 벌여 있었다. 이남산 아래에 있는 공암은 그 빛이 의연한 모습이었다.현재 이 굽이에 이르러 바라보면 앞으로 이남산이 우뚝 솟아 있고 이남산의 발치에 도로가 나 있다. 이 도로를 내는 과정에서 공암은 많이 파손되어 공암의 아랫부분만이 남아 있다.따라서 횡계구곡 제2곡은 굽이의 본래 모습이 많이 훼손된 상태이다. 옛날에는 횡계 가로 공암이 솟아 있고 바위 뒤로 이남산이 솟아 있어 아름다운 경관을 이루었다고 한다.훈지 형제는 이남산 허리에 길이 있어 그윽하고 빼어난 경관을 더하고 인간 세상과는 몇 겹이나 막혀 있다 하였다.횡계구곡 제2곡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에 자리한다. 그런데 훈수와 지수는 왜 이 굽이가 인간 세상과는 몇 겹이나 막혀 있다 하였는가?아니산이 자리하고 공암이 솟아 있는 이 굽이를 인간 세상의 물욕이 존재하지 않는 청정한 굽이로 만들고 싶은 두 선생의 마음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당시 세상은 노론이 정권을 잡고 전횡을 하고 있었다. 유학의 입장에서 본다면 올바른 정치가 아니지만 세상은 이러한 정치를 바꿀 생각이 전혀 없었다.그것은 권력과 부귀를 지향하는 사람들로 가득했기 때문이다. 훈수와 지수에게는 유학의 비조인 공자가 자리한 이 공간만은 인간 세상의 혼탁한 세계와 연결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제3곡 태고와太古窩횡계구곡 제3곡은 태고와太古窩이다. 횡계구곡 제2곡 공암孔巖에서 약 400m를 거슬러 오르면 태고와가 나타난다.횡계리로 들어가는 도로 옆에 자리한 태고와는 조선 숙종 때에 지수가 나이 35세 되던 1701년에 건립한 누각이다. 본래는 ‘태고와太古窩’라 하였는데 1730년 제자들이 개축하여 모고헌慕古軒21)이라 칭하였다.정면 2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인데 사방으로 퇴간退間을 두른 독특한 정사각형 평면구조이다. 모고헌 뒤에는 횡계서당橫溪書堂이 있는데 이 건물은 1927년 후손들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진수재進修齋는 이 건물 안에 있다.훈수와 지수는 “제3곡은 태고와와 진수재가 있다.22)”고 하였다. 태고와와 진수재가 있는 이 굽이를 횡계구곡 제3곡으로 설정하였다는 말이다.벼슬에 나아가는 일이 쉽지 않은 현실에서 훈수와 지수는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태고와와 진수재는 이러한 선생의 삶을 실현하는 터전이었다. 태고와를 지은 지수는 명명의 이유를 `태고와기太古窩記`에 남기고 있다.각주)19)『塤篪兩先生文集』卷2 「詩」 <阿尼山>20)『塤篪兩先生文集』卷6 「詩」 <橫溪九曲敢用晦菴先生武夷櫂歌十首韻> 二曲詩21) 1992년 7월 18일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22) “第三曲有太古窩進修齋 故云云” 『塤篪兩先生文集』卷6 「詩」 <橫溪九曲敢用晦菴先生武夷櫂歌十首韻> 三曲詩 註