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의진 창의지 상권 마지막 부분은 해방되고 6개월만인 2월에 국내 유림 수백여 명과 단체직원 및 시민, 학생 대중이 경상북도의 외진 곳, 죽장면 입암 장터에 모여 순국선열들의 위령제를 거행했다고 적고 있다.돌이켜 생각해보면, 참으로 어수선하고 정신없을 시기에 교통편도 여의치 않았을 곳에 수백의 대중이 모인다는 것이 여의치 않았을 터이다.또한 위령제에서 이루어진 대한독립을 위한 운동 역사 강론에서 “우리 운동자들은 의병으로, 광복회로, 기미 3.1운동으로, 상해임시정부로, 의열단으로, 기타 각종의 운동을 계속하여 ~”라고 하였으니 산남의진을 비롯한 의병활동이 독립운동의 시발점이었다는 분명한 인식과 산남의진이 그 당시 국내 독립운동 지사들, 특히 대한광복회에 미친 영향력을 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하겠다.필자는 2년 전부턴가 산남의진을 소개하는 글을 시작하면서 먼저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알아야겠다는 생각에 산남의진유사와 창의지 하권의 열전에 수록된 인물들을 소개했다.그리고 다시 상권의 역사를 정리하면서 대장 세 분의 기록을 상세히 알려야겠다는 욕심을 갖게 되었다.익숙하지 않은 한문본의 책을 모르는 것은 찾고 물어서 정리해야겠기에 모자라는 부분이 많지만 욕먹는 것이 두려워 할 일을 하지 않는 것이야말로 더 부끄러운 일이 아닐까라는 생각으로 또 시작한다. 2021년 한 해도 힘차게!산남의진역사편 차하(山南義陣歷史編 次下) <山南倡義誌 卷下 1p>상권의 산남의진 역사는 국가의 운명과 맞물려 패하여 망하는 이외에는 도리가 없는 터였다. 당시 군중(軍中)의 애사(哀史)를 일일이 눈물 없이 기록하면 독자의 피눈물을 헛되이 쓰는 일이다.그런 까닭에 대개 참고로 이어가는 이야기를 적고서 붓을 놓거니와 제공(諸公)의 약력에 이르러 본보기를 들어 기록한다.막혀버린 천지(天地)에서 몸을 버리더라도 일월(日月)을 돌이켜 떠받쳐 인(仁)을 이루고자 하는 도(道)와 세치 혀로 백만의 적을 대항하여 꾸짖으며 죽어도 굴하지 않는 용(勇)과 종신토록 구렁에서 엎드려 기쁜 마음으로 굶으며 바꾸지 않는 절의(節義)와 지하에서 내통하여 천하를 놀라게 하는 큰 모략(謀略)이 개인의 실기(實記)에 실려 있으니 곧 영웅의 열전(列傳)이요 열사들의 종합적인 족보(族譜)다.바라건데 독자 제현은 문장의 매끄럽지 못한 부분은 탓하지 말고 여러 의사들의 위대한 업적을 추앙하여 내세에 찬양한다면 곧 국가수비를 함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다.제공실기 척차(諸公實記 摭次) <山南倡義誌 卷下 2p>정환직(鄭煥直)은 자(字) 백온(白溫)이요 호(號)는 동엄(東广)이라. 초명(初名)은 치우(致右)요, 자(字) 좌겸(左兼), 호(號)가 우석(愚石), 열남(洌南)인데, 임금의 은혜를 입어 이름과 자(字), 호(號)를 고쳤다.고려시대 강직한 신하였던 영양공(榮陽公) 습명(襲明)1)의 원손(遠孫)이요. 임란공신(壬亂功臣) 강의공(剛義公) 세아(世雅)2)의 10세손이다.헌종 9년 갑진(甲辰:1884년) 5월 19일에 경상도 영천 검단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유완(裕玩)이 후사가 없어 근심하여 기룡산에서 기도하여 아들을 얻었다.어려서부터 약관(弱冠)에 이르기까지 각지에서 하는 일없이 편안하고 한가롭게 잘 지내니 보는 사람마다 임금을 도울 재주를 감탄하여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생산되는 일은 마다하고 세상을 구원하는데 뜻을 두어 백리해(百里奚)3)의 어린 시절과 같이 사방을 두루 다니면서 비록 가족들이 타향에서 전락했으나 관계하지 않았다. (계속)각주) 1) 정습명(鄭襲明) - 1095년 生~1151년 卒. 고려 중기의 문신, 시인, 작가. 본관은 영일이며 호(號)는 동하(東河), 형양(滎陽)이다. 글을 잘하여 향공(鄕貢)에 급제하였으며 인종조에 여러 번 벼슬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이 되었으며, 관직은 추밀원지주사에 이르렀다. 포은 정몽주는 그의 10대손이다. 의종의 태자(太子)시절 스승이었으며, 삼국사기 편찬 감독관의 한 사람으로 김부식, 김효충(金孝忠) 등과 함께 삼국사기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의종의 비행과 향락을 간하였으나 도리어 의종의 미움을 받았다. 후에 의종의 뜻을 알고 자결하였는데, 의종은 무신정변으로 축출되면서 뒤늦게 그를 찾았다고 한다.2) 세아(世雅) -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본관은 영일(迎日). 자는 화숙(和叔), 호는 호수(湖叟).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사족(士族)으로 향촌의 자제들을 동원하여 편대를 정하고 격문을 작성하여 의병을 규합, 900여명을 모집하여 의병대장이 되었다. 그 해 8월 권응수의 지휘 아래 영천 의병장 정대임(鄭大任)·정천뢰(鄭天賚)·조성(曺誠)·신해(申海) 등과 함께 영천 박연(朴淵)에서 왜적과 싸워 큰 전과를 거두고 영천성을 수복하였으나, 전공포상은 받지 못하였다. 영천성을 수복한 데 이어 다시 경주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장현광(張顯光)·조호익(曺好益)·이준(李埈)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후진을 양성하였다. 병조판서에 추증되고 영천의 환고사(環皐祠)에 봉향되었으며, 그에 대한 『호수실기』가 있다. 시호는 강의(剛義)이다.3) 백리해(百里奚) - 대기만성(大器晩成)의 대명사로 일컬어진다. 중국 춘추 시대 진(秦)나라의 재상으로 자는 정백(井伯). 장성한 후 아내 두씨(杜氏)와 아들 백리시(百里視, 맹명)를 두었다. 그러나 계속 가난에 시달렸고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도, 천거해 주지도 않아 가족과 헤어져서 각국을 전전하다가 우여곡절 끝에 진나라 좌서장이 된 후 아내와 상봉하였고 아들과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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