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겨울은 지난해와 달리 매서운 한파와 많은 눈으로 확실한 계절의 추이를 보여주는 듯하다. 59년 만의 한파는 영하 20도를 웃돌아 시골에서는 간이상수도를 얼어붙게 만드니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니다.게다가 코로나19는 해가 바꿔도 숙지지 않고 더욱 기승을 부린다. 어려운 시기인 만큼 참고 견디는 인내심도 더 많이 요구된다. 어떤 마음으로, 어떤 정신세계를 만들어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는 세상인 듯하다. 모쪼록 마음공부 잘 챙길 일이다.정환직(鄭煥直) ② <山南倡義誌 卷下 2~4p>고종 정해(丁亥:1887년)에 서울 한양에 머물면서 기황지술(歧黃之術)1)로 그 시대의 세상을 울리니 판서 정낙용이 그를 천거하여 태의원(太醫院)에 들어가 전의(典醫)2)가 되었다.고종황제가 용모가 준수함을 보시고 충무위사용행의금부도사겸중추원의관(忠武衛司勇行義禁府都事兼中樞院議官)을 제수하였다.때는 나라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이 많아 밖으로는 열강이 노리고 안으로는 완고한 무리들이 기생충이 되어 매관매직(賣官賣職)을 하는 시절이라, 충직한 성품으로 권세의 무리에 빌붙지 않으니 미관말직으로 6,7년의 세월을 헛되이 보내었다.이에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때에 갑오(甲午:1894)년 동학의 난이 일어났다. 관군은 여러 번 패하고 청일(淸日) 두 나라가 구원을 빙자하여 들어와서는 충청도 아산에서 전쟁을 벌였다.고종황제께서 어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지금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이거늘 경과 같은 지사가 어찌 벼슬자리에서 물러나려 하는가.” 그날로 완전사(翫戰使)로 임명하고 군무대신 조희연과 함께 아산으로 가서 전세(戰勢)를 보라고 명하였다.홀로 행군하여 미처 아산에 도착하기도 전에 벌써 청군은 패주하고 일본군은 승승장구하여 평양까지 추격하였다. 경성에 돌아오니 조정에서는 배청론(排靑論)이 우세하여 승은문(承恩門)을 폐하고 독립문(獨立門)3)으로 고쳤다.이때 일본공사 대도규개(大島圭介)가 대군을 거느리고 경성에 주둔하니 서울지방의 인심이 흉흉하였다.글로써 일본공사를 힐책하기를 ‘우리나라가 비록 적으나 재야에는 벼슬하지 않은 현인(賢人)이 있고 조정에는 국사를 경영하는 사람이 있어 안으로는 나라를 경영하고 밖으로는 가히 적을 방어할 수 있거늘, 공은 어찌 보고 병사를 거느리고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인가. 만약 우방의 도의로 통교를 하고 이전 사람의 교분을 수행하고자 한다면 한 사람의 사신으로도 족할 것이다. 끝내 미혹한 견해를 고집하고 뒤집어 깨닫지 못하면 반드시 전군이 몰살하여 한 사람의 귀환도 보기 어려울 것이니 깊이 헤아려 자세히 알라.’또 고종황제에게 고하기를 “나라의 사사로운 무리들을 진정시키고 어루만져 달래는 것은 불러서 타이르면 끝나는 일에 불과하거늘 어찌 외환을 불러들이겠습니까. 조조가 말한 바, 토끼를 잡으려고 호랑이를 부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고종황제께서 탄식하며 말하기를 “외인이 들어오는 것은 나의 뜻이 아니라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도다.” 하시고, 어지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지금 해서(海西:황해도)의 도적이 세력이 치성하나 마땅한 사자(使者)가 없으니 경에게 맡기고자 하노라.”명을 받들고 나와서 영장(營將) 이진규, 홍원복 등을 거느리고 황해도로 가서 도적의 세력을 탐색하니 도적이 구월산을 근거지로 삼았는데 이곳은 옛날 임꺽정이 근거지로 삼았던 굴이더라.그 세력이 왕성하여 멸시하기 어려운지라 한편으로는 방문(榜文)을 걸어 타이르고 한편으로는 군사를 움직여 진압할 새, 군현(郡縣)을 지나는데 급한 편지가 답지해왔다.보기를 마친 다음 모두 불 속에 던진 후에 말하기를 “나는 다른 고장의 먼 곳에서 온 객으로 만약 급한 소식을 좇아 일일이 들고 나면 다른 사람의 사적인 원한을 입을 따름이라. 국가대사에 어떤 이익이 있으랴.”대중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순종했다. 구월산에 다다르니 산 아래 인근 촌락이 도적의 피해를 입어 도로는 차단되고 민가는 텅텅 비어있는 지경이다. 산 아래에 군량을 옮기고 막사를 갖추어서 정예병을 매복시키고 노약한 병사로 막사를 지키게 하여 미약하게 보이니 과연 적이 한밤중에 기습해왔다.(계속)각주)
1) 기황지술(歧黃之術) - 황제(黃帝)와 기백(歧伯)이 의학에 대하여 논하였다고 하여 황제내경(黃帝內經)을 기황지술이라고 하는데, 황제내경이 널리 전해지며 기황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의학을 가리키는 명사가 되었다.2) 태의원 전의(太醫院 典醫) - 1894년(고종 31) 관제를 개신할 때 내의원(內醫院)에 제거(提擧)와 태의(太醫)를 두었다. 다음해인 1895년 5월에 궁내부관제(宮內部官制)를 다시 개정하여 내의원을 전의사(典醫司)로 고쳐 시종원(侍從院)에 속하게 하였다. 그 뒤 다시 관제를 개정하여 1897년 1월에 전의사를 태의원으로 개칭하고 다음과 같은 관원을 두었다. 즉, 태의원에는 도제조(都提調) 1인, 경(卿) 1인, 소경(少卿) 1인, 전의(典醫) 3인, 전의보(典醫補) 5인, 주사(主事) 2인 등을 두었다.3) 승은문(承恩門)을 폐하고 독립문(獨立門) - 중국사신을 접대하던 모화관의 정문인 영은문을 허물고 그 자리에 세운 것이다. 1896년(건양 1) 미국에서 돌아온 서재필이 조직한 독립협회 발의로 고종의 동의를 얻어 3,825원을 모금해 1896년 11월 21일 정초식을 거행하고 이듬해 11월 20일 완공했다. 이때는 이름만 고친 듯하다(역자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