四曲光風霽月巖 사곡이라 광풍대 제월대 바위이니
巖邊花木影 바위 가에 꽃과 나무 그림자 드리웠네
欲知君子成章事 군자가 글을 이루는 일 알고자 한다면
看取盈科此一潭 이 못에서 물이 채워짐을 보아야 하리라33)
횡계구곡 제4곡 옥간정에 이른 훈수와 지수는 광풍대 제월대 바위를 바라보았다. 횡계 가로 우뚝 솟아 있는 바위는 세상의 풍진을 막아주어 이 굽이를 맑은 공간으로 만들고 있었다. 훈지 형제는 꽃과 나무가 드리운 옥간정 굽이를 바라보며 세상의 근심을 모두 잊고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양성하였다.
훈수와 지수는 군자가 글을 이루는 일을 알고자 한다면 이 못에서 물이 채워짐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학문에 정진하여 일정한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 구덩이에 물이 차는 이치를 보아야 한다고 하였다.
흘러오는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 그 구덩이를 모두 채워야 다시 흘러갈 수 있다. 이처럼 학문은 어느 경지에 이르기 위해서는 일정한 수양을 거쳐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은 점진적 수양을 통해서 한 단계 더 나아갈 수 있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당시의 세상 선비들은 어렵고 더딘 과정을 외면하고 쉽고 빠른 길을 찾고자 하였던 것이다. 이 점을 경계해야 하겠기에 이 굽이에서 훈수와 지수는 이렇게 노래한 것이다.
제5곡 와룡암臥龍巖
횡계구곡 제5곡은 와룡암臥龍巖이다. 횡계구곡 제4곡 옥간정玉澗亭에서 약 150m 정도 거슬러 오르면 횡계교 앞으로 와룡암이 나타난다. 횡계의 왼쪽에 널따란 바위가 자리하고 있는데 이 바위가 와룡암이다. 횡계가 와룡암 옆으로 흐르는데 평시에는 수량이 많지 않다.
시내 오른쪽은 수직의 바위가 자리하고 그 바위를 덮은 느티나무가 있는데 수령이 제법 오래된 듯하다. 암반 위를 흐르는 시내와 양쪽의 바위가 이룬 경치는 절경이다. 이 굽이에 지수가 횡계 수석의 승경을 사랑하여 35세(1701)에 집을 옮겨 거처를 정하였다.
신사년에 비로소 복제를 마치고 선생은 횡계橫溪 수석의 승경을 사랑하여 드디어 집을 옮겨 거처를 정하였다. 먼저 와룡암臥龍巖 위에 작은 집을 짓고 ‘육유六有’라고 편액하였는데 대개 시냇물의 이름이 횡거橫渠와 가깝기 때문에 장 선생張先生이 남긴 말을 취하여 경계하려는 것이었다.34)
지수는 대전리大田里에 거처하다가, 평소 횡계의 경치를 사랑한 끝에 35세에 마침내 거처를 횡계리로 옮겼다. 먼저 와룡암 위에다 작은 집을 짓고 ‘육유재’라 이름하였는데 이것은 횡계의 이름이 중국 송나라 유학자 장횡거張橫渠와 닮은 점이 있어서 장횡거의 남긴 말을 취하여 경계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수가 횡계로 거처를 옮기면서 횡계구곡의 설정이 가능하였다.
대체로 구곡원림의 제5곡은 구곡원림을 경영하는 사람에게 의미 있는 굽이이다. 무이구곡의 제5곡은 대은병인데 이 굽이에 무이정사武夷精舍가 있었다.
지금은 무이정사가 남아 있지 않고 무이서원武夷書院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옛날 주자는 무이정사에서 후학을 가르치며 학문에 정진하였다. 이러한 전통은 조선 사림에게 계승되어 제5곡은 구곡원림의 중심 굽이로 인식되어 의미 있는 처소가 설정되었다.
횡계구곡 제5곡 와룡암은 이러한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경우이다. 이 굽이는 지수가 처음 횡계리로 들어와 거처를 정하고 정착하는 과정에서 가장 먼저 처소로 정한 곳이다.
지수가 이곳에 자리를 잡고 나자 훈수가 또한 왕래하거나 유숙하면서 상호 학문을 토론하였고 원근에서 찾아와 배우는 사람들이 날마다 더욱 많아져서 문밖에는 언제나 신으로 가득찼다고 한다.35) 이러한 굽이를 횡계구곡 제5곡으로 설정한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五曲境轉深 오곡이라 구불구불 경계가 더욱 깊고
臥龍巖上覆靑林 와룡암 위에는 푸른 숲이 덮여 있네
興雲作雨非渠事 구름을 일으켜 비 내림은 너의 일 아니니
任是頑然自在心 완연히 자재의 마음에 맡겨 놓을지다36)
훈수와 지수는 횡계구곡 제5곡에 이르러 굽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굽어 도는 지점에 와룡암이 널따랗게 자리하니 경계가 더욱 깊었다. 와룡암 위로 푸른 숲이 덮고 있어 경치는 더욱 아름다웠다.
훈수와 지수는 와룡암을 바라보고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는 일은 너의 일이 아니니 자재의 마음을 가지라 하였다. 와룡암은 선생 자신을 말한다. 그리고 구름을 일으켜 비를 내리는 일은 백성이 잘 살 수 있도록 하는 정치이다.
백성이 잘살 수 있도록 하는 정치는 벼슬에 나아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당시 훈수와 지수에게는 벼슬에 나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노론이 전횡하고 있는 정치는 훈수와 지수가 나아가기에 너무 높은 벽이었다.
따라서 이런 일은 너의 일이 아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훈수와 지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재의 마음을 가지는 것이었다. 이것이 이 굽이에 육유재를 지은 까닭이었다.
각주)
33)『塤篪兩先生文集』卷6 詩<橫溪九曲敢用晦菴先生武夷櫂歌十首韻> 四曲詩
34) “辛巳秋 始闋制 先生愛橫溪水石之勝 遂移家卜居 先搆小齋於臥龍巖上 扁之以六有 蓋以溪名近於橫溪 故取張先生遺語以自警也” 『塤篪兩先生文集』篪叟先生文集附錄遺事
35) “塤叟先生 亦往來留宿 互相講討 遠近來學者 日益衆 戶外屨常滿”『塤篪兩先生文集』卷 遺事
36)『塤篪兩先生文集』卷2 詩<溪莊四十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