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축년 설날을 맞으면서 산남의진에 관심을 가지고 이 글을 읽어주시는 독자님들께 세배드립니다. 올 한해 뜻하는 바 두루 이루시고 무탈한 나날들, 날마다 좋은 날이소서.
정환직(鄭煥直)⑤ <山南倡義誌 卷下 7~9p>
패역한 무리들이 망명하여 일본에 있으면서 적국을 위하여 내통하는 것에 분노하여 동료들과 함께 의논하여 연명으로 본국으로 환송시키지 않으면 국교를 단절하겠다는 뜻의 격문을 일본 이토히로부미 내각에 보냈다. 그리고 용산에 거주하는 청나라 사람 왕심정에게 양식총 500자루를 사서 비밀리에 입수하기를 약조했다.
하루는 한성신문(漢城新聞)에 남선의병장 정용기가 체포되어 대구경무청에 수감되었다는 기사가 난 것을 보고 크게 놀라 밤을 낮 삼아 대구를 향해 가던 도중에 종제(從弟) 치훈을 만나게 되었다. 지나온 내력을 듣고 경성으로 돌아와 그 사실을 군부에 알리고 석방의 명령을 대구로 보낸 뒤에 치훈과 함께 대구로 내려오니 용기는 이미 석방되어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고향 집에 당도하니 용기가 이한구, 정순기, 손영각 등과 함께 엎드려 통곡하면서 말하기를 “소자 등이 재주가 부족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습니다.” 한다.
공(公)이 여러 사람을 어루만지며 위로하여 말하기를 “전쟁에서 한 번 패함은 예로부터 예사로 있는 일이니 어찌 너희들의 허물이라 책망하겠느냐. 백번을 꺾여도 백번을 계속하는 것이 신하된 자들의 당연한 책무이니라.” 하니 모두 잇달아 응답하였다. 드디어 의논하여 정하기를 내년 5월에 강릉지방에서 서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사람들을 시켜 강화도와 양 산성1)에서 병장기를 뒤져 찾으려 하였으나 이 때 적의 경계가 심하여 발을 들여놓지 못하고, 왕심정을 찾으니 또한 귀국하여 돌아오지 않았으며, 종로 각처에 머물렀던 군인들은 각기 생계난으로 고향으로 떠나가고 한 사람도 없었다.
또 적병은 날로 증원하여 종로 각 거리에 숲처럼 가득하니 1년 만에 세태의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울분이 매우 심하여 날마다 영남의 소식을 기다리는데 소식 오는 것이 없다.
이에 심복 수십 명을 데리고 숨어서 강릉으로 가 탐문하니 동정이 없는지라, 동해안으로부터 청하에 이르러 친동생 환봉의 집에 이르렀다. 환봉이 울면서 오랫동안 소식을 전하지 못한 감회를 서술하고, 또 용기가 지방 각지에서 싸워 크게 이기고 장차 청송과 진보를 향해 간다고 말한다.
영천 고향집에 이르니 종제 치훈과 둘째아들 옥기가 바야흐로 가솔들과 피난준비를 하다가 모두 울면서 나와 맞이하더라. 하룻밤을 겨우 지내고 날이 밝아올 무렵에 마을 사람들이 흩어지면서 일본군 대부대가 몰려왔다 한다.
가솔들과 산골짜기로 피해 있다가 일본군이 물러갔다는 소식을 듣고 집으로 돌아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십리 밖에서 포성이 들린다. 전령이 와서 말하기를 의병이 적과 월연(月淵)2) 뒤편 언덕에서 전투를 벌여 적이 패해 도망갔다 하더니, 저녁 무렵에 용기가 대군을 이끌고 와서 뵙고 때를 놓친 죄를 아뢰었다.
다시 북상(北上)의 계책을 정하려 하니 군중이 모두 말하기를 “날씨는 점점 차가워지는데 의복이 얇으니 옷을 바꿔 입고 진을 움직임이 옳습니다.” 한다. 마침내 이를 허락하고 이르기를 “나 역시 여정에 오른 지 여러 날이라 피곤이 매우 심하니 대중들의 뜻을 따름이 옳다.” 하고 손아래 처남 이능추의 집으로 가서 쉬면서 몸을 다스렸다.
전령의 말이 일본군이 어제 다시 검단리로 와서 가택에 방화하여 서적과 가산을 모두 불태우고 의병에 쫓기어 도망갔다고 하더라. 막곡(幕谷)3)에 머문 지 며칠이 지나 이제나저제나 행군(行軍)의 통지가 오기를 기다리더니 용기가 여러 사람을 데리고 와서 급한 일을 고하거늘 놀라서 깨어보니 때는 광무11년 9월 초하루 밤이었다.
의혹을 풀지 못하여 초조하고 답답하던 중에 전령이 와서 말하기를 “어젯밤에 적병이 입암(立巖)4)에 이르렀는데 의병이 대패하여 장수가 전사하였습니다.” 하거늘 크게 놀라 곧바로 입암에 당도하니 용기와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 등이 모두 힘써 싸우다 전사하였는지라.
시신을 어루만지며 통곡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나를 두고 먼저 이리 되고 말았으니 누구와 더불어 뒷일을 하리오.” 군중에 명을 내려 염습하여 장례를 치르게 했다.
정순기, 우재룡 등이 흩어진 군대를 수습하여 기다리거늘 모두에게 일러 말하기를 “지금 국가의 존망이 이 거사에 있거늘 중도에 우리의 장성(長城)를 잃었으니 이는 천운이 아니겠는가. 오직 여러분들이 충의(忠義)로 우리 황제를 비바람 가운데에서 구해주기를 바라노라.” 하니 군중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대중의 바라는 뜻을 고사하지 못하여 마침내 전군을 통솔하게 되었다.
(계속)
각주)
1) 양 산성(山城) - 남한산성과 북한산성
2) 월연(月淵) -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에 있는 마을. 영천댐에 수몰되었다.
3) 막곡(幕谷) - 포항시 기계면에 있던 마을 지명. 정환직 선생의 처남 이능추가 살던 마을.
4) 입암(立巖) - 포항시 죽장면 입암리. 그 당시는 영천군에 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