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8월2일자 『KBS 역사스페셜, 잊혀진 전쟁 1907 제2부 발굴! 일본군 보병 14영대 진중일지』에서 방영된 내용을 보면, 임종시를 조작하여 정환직 선생을 폄하한 것이 분명한 내용이 들어있다. 家亡身已擒(가망신이금: 집안이 망하고 몸은 이미 사로잡혔네) 始悔此心存(시회차심존: 비로소 이런 마음 가진 것이 후회스럽다) 今行知不歸(금행지불귀: 이제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아니) 一念存幼孫(일념존유손: 한 생각 어린 손자 걱정일세).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자. 나라 걱정으로 의병을 일으키고 65세 노구를 이끌고 항전을 위해 관동으로 이동하다가 적에게 붙잡혔음에도 마지막까지 굴하지 않고 항거하여 일본군에게 총살당하신 분이 후회하면서 손자 걱정을 한단 말인가. 일본인들의 치밀함에 치를 떨 뿐이다. 정환직(鄭煥直) ⑦ <山南倡義誌 卷下 12~14p> 10월10일에 김일언, 정완성의 교만하고 사나운 죄를 다스려 군법을 행하고자 하다가 소모(召募)의 공을 인정하여 특별히 사면하여 그 죄를 줄여서 다스렸다. 우각(愚覺)1)에 이르러 화당(火黨)2) 4인을 베었다. 11일 해 뜰 무렵에 다시 흥해를 습격하여 수십 명의 적을 베고 수십 자루의 총기를 노획했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망천령(網川嶺)을 넘고 한 부대는 여령(麗嶺)을 넘어 곧바로 청하로 들어가니 적이 바다 위의 병선(兵船) 수 척에 있다가 매우 급히 상륙하는지라 퇴각하여 정탐하다가 비가 오락가락하여 보경사로 들어가 잠시 머물기로 하였다. 큰비가 5,6일간 계속되었다. 사람을 청송에 보내어 이세기 등과 연락하여 화약을 구해왔다. 20일에 영덕 정암(靜巖)으로 가서 일본군 척후 1명과 순검 1명을 포획하여 죽였다. 영덕 도천(道川)에 이르러 노략질한 죄를 다스려 도포장 고찬을 참(斬)하였다. 이때 적의 군세가 날로 왕성해지는지라 양로군을 영덕에서 취합했다. 서종락이 사람을 보내어 다음 달에 진영으로 돌아오겠다고 보고했다. 29일 일본군 척후 한 명을 사살했다. 영덕 유암(酉巖)에 도착하여 11월2일 이른 새벽에 적의 야간기습으로 남경숙이 전사하고 장시간의 격전 끝에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이날 밤 위급한 까닭에 김태환의 호위를 받아 급히 은굴(銀窟) 속으로 피신하였다. 11월3일 남경숙의 죽음에 분노하여 해뜰 무렵 3분대로 나뉘어 영덕으로 들어가서 적 4명을 사살하니 적이 황급히 동문으로 도망하여 바다로 들어갔다. 군문집사가 탄약이 부족하다고 보고하는지라 청하로 회군했다. 각지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수집하니 일본군 병선(兵船)이 포항으로부터 6,7척이 북상하고, 청송으로부터 일본군 4,5백 명이 해안으로 향해 오는데다 안강, 기계 등지가 적병으로 뒤덮였다 한다. 한밤중에 영덕 금정(金井)에 도착하니 포성이 크게 일어나고 유탄(流彈)이 비 오듯 쏟아지는지라 북동대산으로 회군하였다. 의논 끝에 이르기를 “지금 군중(軍中)에 탄약 등 무기가 고갈되고 사면에서 적의 공격을 받으니 별단의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 나는 먼저 관동으로 들어가 그대들을 기다릴 터이니 그대들은 각지로 흩어져 탄약 등 군수품을 구하여서 관동으로 들어오라.” 하고 명하였다. 혹은 상인으로, 혹은 농부로 변장하여 한 사람도 남김없이 모두 파견한 후에 둘째 아들 옥기는 큰 아들 용기의 무덤 돌보는 일을 맡겨 보냈다. 출발 후 병(病)을 얻어 각전(角前) 마을에서 2일을 머물렀는데, 바야흐로 출발하려는 즈음에 포성이 사방에서 일어나더니 적병이 포위하여 손쓸 새 없이 붙잡히고 말았으니 이 운명을 어찌한단 말인가. 위엄을 잃지 않고 태연히 적을 꾸짖으니 적장이 온순한 태도로 선생을 대하면서 마차를 준비하여 태우고 출발했다. 영덕으로부터 청하, 흥해, 포항, 경주, 영천을 거쳐 대구에 당도하여 온갖 가지로 회유하였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았다. 적진에 있으면서 슬픈 기색 없이 시를 남기니 “身亡心不變(신망심불변:몸은 죽으나 마음은 변치 않으리) 義重死猶輕(의중사유경:의가 무거우니 죽음은 오히려 가볍다) 後事憑誰託(후사빙수탁:후사를 누구에게 부탁할꼬) 無言坐五更(무언좌오경:말할 데 없으니 긴 밤을 앉아 새누나)” 하였다. 다시 영천으로 돌아와 남교(南郊)에서 순절하니 때는 광무(光武) 11년(1907년) 11월 16일이다. 이 날, 때 아닌 광풍이 일고 태양이 빛을 잃었으며 우레소리가 크게 일었다. 군민(郡民) 이용훈 등이 염습해서 고향으로 운구했다. 당시 사람들이 선생 부자의 사적(事蹟)을 추모하여 마을 이름을 충효(忠孝)라 고쳐 불렀다. (끝/정용기 대장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각주) 1) 우각(愚覺) - 포항시 흥해읍과 신광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은산의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 300여년 전에 이언적의 손자 중 다섯 형제 중 막내인 이의택이 입향하여 여강 이씨 집성촌을 이루고 살게 되었는데, 이때 이의택이 어리석음을 깨닫는 현자의 마을이 되라는 뜻으로 愚覺이라 한 후에 도은산을 중심으로 비학산에서 내려다 보면 마을 형상이 누워 있는 소의 형상이고, 소의 뿔과 같은 지형에 위치한 마을이라 하여 牛角이라 고쳤다고 한다. 이 글에 나오는 망천령, 여령, 정암, 도천, 유암, 금정, 각전 등의 지명들은 현재 포항, 영덕, 청송 일대의 고개나 마을 이름들이다. 2) 화당(火黨) - 남의 재물을 마구 빼앗으며 행패를 부리고 돌아다니는 무리. 화적(火賊), 명화도적(明火盜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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