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성리학자 병와(甁窩) 이형상(李衡祥, 1653년~1733년) 선생은 경주부윤과 제주목사 등을 지냈다. 은퇴 후 대부분의 생애를 경상북도 영천시 호연정(浩然亭)에서 20여 년간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정진했다.
‘병와 이형상 선생의 학문과 사상’ 학술대회가 지난 19일 영천시 평생학습관 우석홀에서 병와연구소와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로 열렸다. 학술대회는 선생을 재조명하는 뜻깊은 자리로, 소중한 지역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재해석하며 선생의 사상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 시간이었다.
이 자리에서는 20여 년간 지역에 머물며 성리학·예학·문학·자학·역사·천문·지리·음악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무려 188종 415책에 달하는 방대한 저술을 남긴 병와의 학문세계를 들여다보고 학술대회를 통해 병와학(甁窩學)을 새롭게 정립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본지는 이날 학술대회 주제별 토론을 지상 중계함으로써 시민들과 지역의 소중한 문화유산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데 의미를 두고자 한다. (편집자 주)
■기조발제: 甁窩 硏究의 현황과 과제
박규홍/ 병와연구소 소장
병와 이형상 선생은 저술의 상당 부분을 1700년부터 1728년까지 영천 호연정에서 생활하면서 이루었고 지금 호연정에는 보물로 지정된 10종 15책 중 9종 14책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여러 유품이 보관돼 있다.
2016년 5월 27일 인근의 학자들이 참석해 병와에 관심이 많은 분들이 “방대한 저술에 비해서 연구가 너무 미흡하다. 연구기관이 필요하다”는 논의를 했다. 작년 11월 병와연구소가 출범했고 첫 행사로 학술대회를 열게 됐다.
‘병와유고’는 1958년 심재완 교수가 쓴 논문 “병와가곡집의 연구”의 발표에 이어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한 권영철 교수의 1978년 “병와 이형상 연구”에서 저서로 현재 남아 있는 것이 142종 326책이라고 소개한 바 있다.
선생은 자신의 악부에 스스로 筆不休(필불휴)라 표현한 것처럼 끊임없는 집필활동을 하셨다. 병와 선생이 실제 어떤 글을 얼마나 남겼는가. 연구자 권영철 교수는 현재 남아 있는 것이 142종 326책이라고 했고, ‘병와저서목록일람표’를 제시했다.
병와저서목록에는 성리학서 13종, 예학서 11종, 보서 18종, 지리서 9종, 역사서 3종, 주의서 2종, 일기문 3종, 잡서 8종, 역서 1종, 문집 5종, 유묵 2종, 목록서 2종, 기타 19종으로 정리해 총 96종 247책으로 파악했다.
이 밖에 여러 학자의 주장이 모두 달라 병와 선생이 실제 어떤 글을 얼마나 남겼는지 질문을 던진다. 자료에 따라 서명의 출현여부를 대조해 표를 만들어 정리해보면 168종 395책이 나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그러나 이정옥 교수의 ‘병와 이형상’에는 이전에 보이지 않던 서명이 다시 나온다. 6종 6책인데 이를 더하면 174종 401책이 되고 ‘정안여분’에 나오는 14종의 서명까지 더하면 188종 415책이 된다.
■발제1) ‘탐라순력도’의 회화 作圖法 고찰
강창언/ 제주도예촌장
병와 선생이 1702~1703년 제주목사로 재임할 때 군수와 민정, 특산품 등을 점고해 왕정에 보고하던 지방 점검이 순력이다. 도첩이 남았지만 약 270년간 발견되지 않다가 1974년 후손들이 공개하며 세상에 알려졌다. 화풍은 민화와 지도의 성격을 띤 화첩이며, 제주식 회화로 독창성이 있다. 이 그림은 하시관점화로 보인다.
제주지역의 무기, 군력 등과 국내외 도해 항해가 가능한 방향, 위치, 거리 등을 파악할 수 있는 최상의 군방지도이고 사람과 군마에 이목구비를 생략한 점, 금귤의 금니를 채색하고 있는 점, 화지의 테두리를 의장한 점, 무늬가 잇는 비단장식의 표지로 장황한 점, 대도첩 등의 특징으로 왕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탐라순력도의 기획과 기록, 화의 등 총괄은 병와가 했고 작도는 이형상과 김남길, 묘사와 채색은 김남길이 한 것으로 공동작인 것으로 보인다. 투시도법과 투영도법의 2~3첩화를 비롯해 무한시점의 작도법을 확인한다. 또 시공을 초월한 배반신 흉반신 상반신 하반신 비박신 경각신 묘사는 과거와 미래를 표현한 3차원 공간과 시간을 의미하는 작도다.
■토론) ‘탐라순력도’의 회화 작도법 고찰에 대한 토론문
이인숙/ 영남대 교수
탐라순력도는 일반적인 감상화와 다르고 현재의 일률화 된 시각법과는 다르다.
또 이 그림이 ‘하시관점화’라는 주장은 탐라순력도가 족자나 병풍처럼 세워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손에 들고 보는 첩 그림이지만 감상의 환경은 두루마리 그림이나 화첩그림에 공통되는 조건이므로 역원근법이 적용되고 농담이 거꾸로 되었다고 보는 것은 무리라 생각된다.
그림은 작도법이라는 말보다 작화법이 더 적절할 것 같다.
■발제2) 병와 이형상의 ‘북설습령北屑拾零’ 연구
구지현/선문대학교 교수
북설습령은 조선시대 청나라에 관한 최초의 저술로 청에 대한 개설적인 자료로 사료적 가치와 더불어 외교사 연구에도 기여함이 크다. 이 책을 쓴 배경은 청나라에서 자문이 온 일로 인해 북방 오랑캐인 요, 원, 금나라의 경계에 대해 알아볼 필요성이 생겼을 것이다.
17세기후반 청에 대한 정책은 두 가지였다. 청의 내란이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중원에서 버티지 못하고 심양이나 영고탑으로 돌아가고, 이 때 함경도로 경유하면서 조선의 동북 지방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에 대비해야 한다는 것.
다른 하나는 여진족이 중원으로 이동한 틈을 이용해 조선 초기 강역을 회복하고 조선의 행정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주장으로, 청이 고토로 돌아가더라도 굳이 낯선 조선의 영토를 우회하지 않을 것으로 보는 것.
병와는 이런 상황을 ‘둔서록’에서 ‘팔외십요소’에서 밝히고 있다. 여러 경우의 수를 예상하여 가능성을 예측한 것이다. 병와는 적을 방어하고 효율적인 북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그 전단계로 북방 세력의 내력을 조사한 것이 북설습령이다.
또한 북설습령은 당시 조선인이 지닌 북방관에 대해 자세히 알려준다.
■토론) 병와 이형상의 ‘북설습령’연구에 대한 토론문
박경수/ 대구가톨리대학 교수
북설습령의 내용보다 책을 쓴 배경과 단편적인 특징에 주안점이 맞춰져 있다. 또 저서에 대한 병와선생의 역사인식에 관한 부분이 궁극적인 이유인데 둔서록과 비교된 연구에 비중이 많아 보인다.
‘연유한 것으로 보인다’, ‘아닌가 한다’, 라는 표현과 ‘추정한다’, 등의 논조보다 부연 설명하는 내요이 주류다. 모든 논문은 정확한 사료에 기반한 근거이론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병와 선생의 북방관이 조선인 전체를 의미하는 발상은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요.
■발제3) ‘금속행용가곡’의 성격과 문학적 위상
김용찬/ 순천대학교 교수
조선후기 시조사는 전문 가창자의 출현과 다양한 시조작품을 수집해 음악적으로 분류한 김천택의 ‘청구영언’(1728년)으로부터 시작된다. ‘병와가곡집’은 이형상이 편찬한 것이 아닌 것으로 판단한다.
다만 병와의 기록중 시조 갈래와 긴밀하게 연관돼 있는 ‘지령록’에 수록된 ‘금속행용가곡’이 있다. 이 자료는 현존 최고의 가집인 김천택의 ‘청구영언’보다 앞선 시기(1706년)에 기록으로 정착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금속행용가곡’은 조선후기 시조사는 물론 음악사의 측면에서도 중요한 논점을 포함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병와가 남긴 ‘금속행용가곡’에는 한역 시조 55수가 실려있다. 병와는 전래음악을 크게 아악과 속악으로 분류하고 있다. 여기에는 속악을 한역해 수록했다.
작품들을 평조, 우조, 계면조로 구별하여 수록하고 있다. 또 음악의 기준으로 사용하던 금보를 참고했음을 보이며 자의적으로 한 것이 아님을 밝히고 있다. 병와의 다른 저작인 ‘악학편고’ 등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금속행용가곡’은 당시의 주류 곡조이던 삭대엽이며 제1지 등의 명칭은 초삭대엽 혹은 삭대엽 제1 등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악조의 분류는 당시 병와가 인지하고 있던 음악적 특성에서 기인하며, 평조와 우조에 비해 계면조가 그만큼 연창하기 어렵다.
■토론) ‘금속행용가곡’의 성격과 문학적 위상에 대한 토론문
임재욱/ 경북대학교 교수
‘금속행용가곡’ 당시의 주류 곡조가 삭대엽이라고 보는데 1707년에 나온 ‘운몽금보’에는 삭대엽과 중대엽도 기록되어 있다. 그 이후에 나오는 금보와 가집에도 중대엽은 지속적으로 등장하는데 18세기 중엽까지 중대엽을 애호하던 사람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 준다.
또 이 자료에 수록된 작품들 가운데 일부 특이한 주제를 다룬 것도 있다는데 어떤 것인지. 청구영언보다 이른 시기의 가집을 비교해 보면 유사성이나 차이점을 확인할 수도 있지 않을까. 기구산로는 기구한 인생길을 비유한 것이 아닌가 한다.
■발제4) 樂學便考 소재 聲氣原流의 내용과 사상
김진희/아주대학교 교수
병와 이형상의 방대한 저작 중에서도 ‘악학편고’와 ‘악학습령’ 등 가락 관련 저작물들이 국문학 분야에서 주목받아 왔다.
악학편고 첫머리에 실려있는 ‘성기원류’의 내용을 살펴보고 병와의 가락론을 조망하는데 한 발판을 마련하고자 했다. 궁, 상, 각, 치, 우의 오성과 황종 이하 응종까지의 십이률, 팔음을 음양오행사상에 입각해 설명해 놓았는데 내용과 형태에 따라 성음, 율려명의, 오성의 역학적 해석으로 삼분했다.
송대 소옹의 ‘황극경세서’ 및 이와 관련돼 집필된 서경덕의 ‘성음해’의 영향을 함께 받아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천지 음양의 법칙에서 성음과 율려가 파생된 원리를 서술하여 역학적 가악관의 대전제를 마련하였다.
악론의 주요 개념인 율려, 오성, 팔음에서 음양론의 서술과 양의 율과 음의 여가 제작된 과정을 ‘율려지’의 내용을 인용하여 제시하고, 율려의 명의와 절대음인 율려에 의거하여 구현되는 상대음인 궁상각치우 오성의 명의에 대해 서술했다.
또 오성으로 이루어진 음계를 실제로 구현하는 악기인 팔음의 종류와 그 역하적 의미를 해석했다. 특히 진양 ‘악서’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파악했다.
음우논적 해석으로는 명대 주지번의 ‘해편심경’의 내용을 상당부분 인용했으며, 그 외 ‘훈민정음’ 해례를 참고하는 등 다양한 전적을 참고해 오성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성기원류’의 내용과 형식을 통해 병와는 음양오행사상에 의한 전통적 가악론의 개요를 제시하고, 더불어 지역에 따른 가악의 상대성을 인정하는 탈중세적 가악관을 피력했다.
■토론) ‘악학편고 소재 성기원류의 내용과 사상’에 대한 토론문
허영진/ 고려대학교 교수
밝혀진 새로운 사실이 많은데 의미나 역사적 의의를 소극적으로 서술했다. 연구대상과 방법, 연구사적 의의를 충분히 공감하나 논문의 기본 요건인 목적 및 필요성이 제시되지 않았다.
‘원류’ 초반부의 내용과 구성방식을 역학적 가악관을 대전제로 한 원류의 이해를 위해 중요 전거로 파악한 ‘황극경세서’, ‘율려지’ 와의 직접적인 영향관계, 역학사상, 역학적 해석에 대한 보완이 필요하다. ‘황극경세서’의 인용이 자국 가악의 특성에 대한 인정 수단으로 본 것도 논리적 비약으로 오인될 수 있다.
■발제5) 甁窩詩에 나타난 說理的 性向 考察
이정화/ 동양대학교 교수
청백리에 녹선된 병와 이형상은 유민, 빈민을 비롯한 어려운 환경의 백성들을 구휼하는 일에 힘쓰고, 효행깊은 사천을 양민으로 면천시키는 점에서 백성들의 삶을 보살피는 목민관의 본보기가 됐다.
또한 성학을 실천하는 어진 선비의 삶으로 제주도에서 환생생활을 할 당시 혹세무민의 대상이 무언지 살피고 몸소 처단하는 일에 앞장섰다.
그는 선을 따르기를 좋아하는 일을 하는 듯이 하고, 악을 제거하기를 내버리는 듯이 하며, 천지가 열려 만물을 생성함에 모든 사물이 각기 바른 성명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어려움이 있더라도 바르게 행해야 복을 받는다는 것을 일깨웠다. 병와는 관료이기 전에 학자였고, 해박한 지식이 실학적 사고와 연결된다.
병와는 생전에 ‘병와순옹’을 명정에 써 달라고 당부할 정도로 내면 수양에 철저했고, 실천의지가 강했다. ‘경전명’에서는 내면을 잘 다스려야 함을 , ‘경후명’에서는 먼지를 막기위해 거울에 덮개가 있는 것처럼 유자의 수기도 허물없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일깨운다.
‘절조축’은 자신의 기상을 낙락장송에 비유하며, 올곧은 선비로 산 자신의 정신세계가 담겨있다. ‘임고알묘’에는 유학의 도통을 전수한 포은을 스승으로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이 보인다. 설리시에 내재된 시정신은 기본적으로 이학자의 구도정신으로 시를 통해 마음을 다스리려 한 것이다.
병와 시에는 ‘대학’을 비롯한 경전을 통해 성학의 가르침을 체득하고 통찰을 시화한 작품이 발견된다. 또한 실천궁행의 자세와 가야할 길이 ‘도’임을 보여준다. 이는 일거일동을 삼가고 신려하는 삶의 자세가 반영된 것이다. 그의 시에는 본성을 잃지 말고 청렴결백한 삶을 살기를 권면하는 가르침이 들어있다.
■토론) 병와시에 나타난 설리적 성향 고찰
최종호/경북대학교 교수
병와선생이 옷을 백번 기워 입었다는 백결선생의 청빈한 삶을 흠모한 것이 아니라 그에 비유될 정도로 가난했음을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도 소부와 허유의 고사를 전고로 하여 진정한 은일지사의 삶을 권하고 있다고 하지만 공자가 ‘새와 짐승들 하고 함께 떼 지어 살 수 없다’고 한 말처럼 퇴계와 포은 선생은 도연명, 백결선생, 소부, 허유 등의 인물과 차별을 두어야 한다. ‘執中’과 ‘精一’에 삼왕의 왕도가 내재되어 있다는 언표도 과하게 포괄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