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의 나이에 산남의진에 투신하여. 정용기, 정환직, 최세윤 세 대장을 차례로 모시며 좌포장, 좌영장, 중군장의 요직을 거치며 왜적과 싸우다가 결국 적에게 체포되어 30년형을 선고받았으나 묶인 몸으로 심문관을 의자로 쳐서 쓰러뜨리고 동료들을 탈출시킨 후 분연히 죽음을 맞았으니 28세의 나이였다.
마침 영천시의 배려로 작년에 진입로를 포장했으나 그분의 묘소가 너무도 초라한데다가 1964년 세운 비석조차 비스듬히 넘어가 안타까운 터에 후손들은 찾지 못하고 산남의진기념사업회 혜신 회장스님의 원력으로 올봄에 단장을 했다.
기룡산 자락에 있다. 뜻있는 분들이 많이 오셔서 참배해주시면 그 넋을 조금이라도 위로해드릴 수 있으려나 한다.
정용기(鄭鏞基) ③ <山南倡義誌 卷下 17~19p>
때에 아버지 도찰사(都察使) 공이 경성에서 영남으로 내려오니 이한구와 함께 공을 모시고 경상도 일원 각지로 돌면서 선전(宣傳)하고 집으로 돌아오고 도찰사 공은 경성으로 돌아갔다. 또다시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는 뜻을 적은 글을 각 군(郡)과 진(鎭)에 글을 써서 부쳤다.
이 때 내부에서 계획을 돕는 사람으로는 이한구(李韓久), 정순기(鄭純基), 손영각(孫永珏) 등이 있고, 각지에서 활약하기로는 이규필(李圭弼), 백남신(白南信), 정완성(鄭完成), 최기보(崔基輔), 정대하(丁大厦), 이창송(李蒼松) 등이 있으며,
각 군에서 비밀리에 통모(通謀)하기로는 영천에 정연호(鄭淵浩), 이형표(李亨杓), 이수인(李壽寅), 정치열(鄭致烈), 정치석(鄭致錫), 정치우(鄭致宇), 이중구(李重久), 정진구(鄭鎭久), 이두규(李斗圭) 등이 있고, 경주에 서준성(徐俊成), 이종곤(李鍾崑), 홍재병(洪在昞), 이능추(李能樞), 손수기(孫秀基), 이밀구(李滵久), 손익선(孫益善), 김태환(金泰煥), 이훈구李勳久)가 있었으며,
청송에는 서종락(徐鍾洛), 남석우(南錫佑), 남석인(南錫仁), 남석헌(南錫憲), 김태언(金太彦), 조태초(趙太超), 오상영(吳相泳)이, 신녕(新寧)에 이성활(李聖活), 성낙희(成樂熙), 권규섭(權奎燮)이,
흥해에 최세한(崔世翰), 정래의(鄭來儀), 조성목(趙性穆), 청하(淸河)에 오수희(吳壽羲), 김찬묵(金粲黙), 김상규(金相奎), 의성에 박태종(朴泰宗), 상주(尙州)·선산(善山) 연락에 양제안(梁濟安), 청도(淸道)· 밀양(密陽) 등지에 박한종(朴漢宗), 울산 등지에 이규환(李圭桓), 영해에 신태호(申泰浩)1)가 있었다.
백남신(白南信), 최기보(崔基輔), 최치환(崔致煥), 정진학(鄭鎭鶴), 정완성(鄭完成) 등으로 사냥꾼과 엽총을 모집하게 하고 이한구(李韓久)를 시켜 청송에 가서 군사들을 인솔해서 돌아오게 하였다.
정순기(鄭純基)를 영해에 보내어 신태호(申泰浩)와 약속을 정하고, 이규필(李圭弼)로 하여금 흥해로 가서 정래의(鄭來儀) 등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으며, 이종곤(李鍾崑)을 경주로 보내어 대중을 인솔해서 돌아오게 하였다.
홍구섭(洪龜燮), 권규섭(權奎燮), 김태언金太彦) 등이 도착하고, 신태호의 종사(從事) 김종필(金宗弼)이 와서 신태호가 영해에서 의병을 일으켰다고 전해왔다. 이때 사방의 동지들이 모두 와서 모인지라, 의병 진영을 산남의진(山南義陣)이라 이름하고 부서를 정함에 모인 사람이 모두 공을 대장으로 받들어 모셨다.
이에 중군장(中軍將) 이한구, 소모장(召募將) 정순기, 참모장(參謀將) 손영각, 도총장(都摠將) 이종곤, 선봉장(先鋒將) 홍구섭, 후봉장(後鋒將) 서종락, 좌영장(左營將) 이경구, 우영장(右營將) 김태언, 연습장(練習將) 이규필, 도포장(都炮將) 백남신, 좌익장(左翼將) 정치우, 우익장(右翼將) 정래의, 좌포장(左炮將) 이세기, 우포장(右炮將) 정완성, 장영수위(將營守衛) 최록, 군문집사(軍門執事) 이두규로 진영을 편성하고 드디어 행군을 시작했다.
이때에 신태호 진영에서 패했다는 소식이 전해왔다. 장수들에게 말하기를 “태호와 나는 연결되어 있어 기각지세(掎角之勢)를 취하고자 하였거늘, 이제 태호가 영해에서 패하였으니 이 때 어찌 앉아서 보고만 있겠는가.” 하고 영해를 향해 진군했다.
병오(丙午:1906)년 4월28일 경주 우각(愚覺)2)을 지나게 되었는데, 작은 숲속에 병정이 나타났다. 부하를 시켜 그를 잡아 문서를 하나 취해보니 이는 경주 진(鎭)의 신석호의 문서다. 글의 뜻이 간절하고 애틋한지라3) 경주로 가고자 하니 이한구가 동행하고자 한다.
저지하며 말하기를 “신석호가 보인 뜻은 나의 사사로움으로 편안하고 침착하기 어려운 일이나, 우리의 대사는 대국적으로 생각해야 하오.” 하고 이한구에게 진영을 통솔하면서 결과를 기다리라 하고 경주로 갔다.
신석호가 겸손하고 정중하게 영접하면서 위로하여 말하기를 “나라 일을 바로잡음은 마땅히 하늘의 때를 기다려야 하거늘 어찌 이와 같이 외람되이 행동하여 스스로 등불을 끄는 나비가 되려 하시오. 나는 충의지사가 모랫벌에서 헛되이 죽는 것을 불쌍히 여기고, 헛되이 생명을 상하면 이익이 없을까 하여 공을 이곳으로 오시라 하였소.”
(계속)
각주)
1) 신태호(申泰浩) - 신돌석 장군의 본명
2) 경주 우각(愚覺) - 현, 포항시 흥해읍과 신광면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도은산의 서북쪽 산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마을
3) ‘귀서(貴書)를 받아 보고 그 의기의 충천함을 감탄하였다. 비록 그러나 근자에 위로부터 명령이 있기를, “일본은 우의를 존중히 여겨 조선의 내란을 평정하려 생명과 재산을 희생하고 군대를 출동시킴은 헤아릴 수 없이 감사한 일이거늘 이를 생각지 않고 국내 각지에 민심의동요가 날로 심하니 이제부터는 그 선동한 자를 낱낱이 포살하라.”하고, 또 일설에는 서울에서 어떠한 대관(大官)이 잡혔다 하니 혹은 존공(尊公)의 아버지가 아닌가 추측한다. 나의 이 말은 다만 초(楚)를 위하고 조(趙)를 위함은 아니니 깊이 생각함이 어떤가?’ <山南倡義誌 卷上 18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