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용기 대장이 아버지가 서울에서 붙잡혔다는 거짓 편지에 속아 경주 진(鎭)에 단독으로 들어가 참령 신석호에게 체포당하는 장면을 보면서 절로 가슴이 답답해온다. 대장이 돼서 어찌 저리 어리석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다시 돌이켜보면 아버지 정환직 공이 끼치는 영향이 참으로 지대했다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산남의진의 거병 동기가 아버지와 함께 서울공격이었으니 말이다. 또한 겨울과 봄을 거쳐 반년 동안이나 울화병을 견디면서도 안간힘을 써서 진영을 재조직하던 그 심정은 어떠했으랴. 이러한 장면 하나하나가 박진감 넘치는 이야깃거리가 되니, 얼른 힘을 모아 산남의진을 스토리텔링하고, 소설로도 쓰고, 만화로도 나오고, 영화도 찍고 해서 널리 선양작업을 해야 할 일이다. 정용기(鄭鏞基) ④ <山南倡義誌 卷下 19~21p> 그제야 속아서 붙잡힌 것을 깨닫고 분노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말하기를 “지금 이 나라 종사(宗社)가 전복될 지경이라, 이천만 백성이 모두 손을 드리운 채 포박당할 지경이고 군주로 하여금 회함지행(會函之行)1)을 당하게 할 처지가 되었다. 내가 먼저 의로운 소리를 선창하여 위로는 사천 년 호국영령을 위로(慰勞)하고, 아래로는 세계 만국의 이목(耳目)에 알리고자 한다. 신석호 역시 개탄하면서도 갖가지 말로 설득하나 끝내 듣지 않는지라 할 수 없이 상부로 호송하였다. 대구 옥에 도착하여 수감 중에 있는 박옥계(朴玉溪), 이경재(李敬齋), 김랑산(金浪山)을 만나 함께 비분강개의 심정을 시(詩)와 술로 서로 주고받으니 자연히 초수(楚囚)의 눈물2)과 같았다. 수위하는 병정들이나 순검(巡檢)3)들이 흠모하고 존경하지 않는 이들이 없어 술과 고기를 보내 위문하는 것들이 매일 끊어지지 않았다. 이내 석방되어 돌아오니 지나는 큰길가에서 환호하며 환영하고 배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앞서 이한구(李韓久)가 정순기(鄭純基)를 경주에 보내어 대장이 속임을 당해 붙잡힌 것을 듣고 장병들에게 맹세하여 말하기를 “정 대장이 만약 돌아오지 못하면 우리가 어찌 홀로 살아남으랴.” 하고 부대를 통솔하여 신태호(申泰浩)에게 사람을 보내어 군대를 합하여 경주를 습격할 뜻을 통모(通謀)하였다. 정순기가 보낸 사람이 경주로부터 와서 이한구에게 고하기를 “대장은 대구로 호송되었고 관변을 밀탐한 즉, 일이 작고 가벼우니 확실히 알기 전에 번다한 일을 만드는 것은 불필요하다.” 하였다. 몇 달 사이에 이한구가 부대를 거느리고 각지에서 전투를 지휘하다가 장수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 지금 민심이 바르지 않으니 잠시 휴식하고 정 대장이 돌아오면 다시 거병하는 것이 옳겠다.”하고 군대를 해산하여 보내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검단리에 도착하니 여러 사람이 모두 모여 서로 만나 크게 환영하였다. 이때 아버지 정환직 공이 경성으로부터 돌아왔다. 모든 사람들과 울면서 일을 그르친 죄를 설명하고 내년 5월에 관동(關東)에 들어가기를 기약하는 명령을 받은 후 정환직 공은 다시 경성으로 돌아갔다. 바야흐로 거병을 계속할 준비를 하던 중에 울화병이 커져서 겨울 석 달, 봄 석 달을 병석에 눕게 되어 이한구, 정순기 등을 각지로 보내 일이 뜻과 같지 않음을 알렸다. 광무10년(1906년) 여름 4월에 남석인(南錫仁), 이세기(李世紀) 등을 보내어 청송, 진보 등지에서 병사 모집을 하다가 병정들과 싸우게 되었는데 패하여 적에게 잡히게 되었다. 이세기는 용맹이 있는 자라 탈출하여 돌아오고 남석인은 대구 옥에서 순절하였다. 다시 정순기, 이종곤(李鍾崑)이 청송으로 가서 모병해서 돌아왔고, 이규필(李圭弼)로 흥해, 청하 등지에서 모병해서 돌아오고, 홍구섭(洪龜燮)을 경주로 보내어 모병해서 돌아오고, 정완성(鄭完成)으로 하여금 부산으로 가서 화약을 사서 돌아오게 하고, 이규환(李圭桓)이 울산에서 모병해서 돌아왔다. 6월에 군부가 해산 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울산병정 김성일(金聖一), 조선유(趙善裕) 등이 병정(丙丁) 수십인을 거느리고 입진하고, 남영병정 우재룡(禹在龍) 등이 입진하고, 의성에서 박태종(朴泰宗) 부대, 신녕에서 권규섭(權奎燮) 부대가 입진하고, 이형표(李亨杓)가 돌아왔으며, 이한구도 각지를 돌아 돌아왔다. (계속) 각주) 1)  회함지행(會函之行) - 춘추시대 초나라 회왕이 전쟁에서 연패한 상태에서 진나라가 함곡관에서의 회맹을 제의하자 주변의 반대를 뿌리치고 회맹장소에 나갔는데 진이 회왕을 압송하여 무리한 요구를 하였고 이를 거부하자 연금 당하여 연명하다가 타국에서 죽었다. 2) 초수지대읍(楚囚之對泣) - 초(楚)나라에 붙잡힌 사람이라는 뜻으로 초나라 사람 종의가 진나라 옥에 갇혀 있었던 데서 나온 말이다. 죄수의 몸으로 타향에 갇힌 슬픔을 말함 3) 순검(巡檢) - 지금의 순경과 유사한 직무를 맡아보았다. 갑오개혁 때인 1894년(고종 31) 7월 14일 신식경찰제도의 실시에 따라 종전의 좌우포도청을 합쳐서 경무청이 신설되었다. 경무청은 내무아문에 속했고, 서울의 경찰사무를 맡아보았다. 경무청의 관제는 경무사·경무관·총순·순검 등으로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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