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명 주소를 시행한 후로 자연부락은 물론이고 법정 리(里)의 이름조차도 곧 사라질 지경이 아닌가 하는 노파심이 든다.
산남의진역사 소개글을 쓰면서 창의지를 읽다보면 행군이나 전투장면들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구체적인 지명이나 고갯마루, 산 이름들이 적시되어 있어 찾아야 하는 입장에서 더욱 걱정이다.
올해 산남의진기념사업회의 주요사업의 하나로 문헌에 나오는 지명을 찾아서 답사하고 그 유허를 알아내는 작업을 하려한다. 아직 모르는 지명들이 많아 위치를 상세히 알려드리지 못함에 대한 양해를 구할 밖에 도리 없음이 안타깝다.
정용기(鄭鏞基) ⑥ <山南倡義誌 卷下 23~25p>
군사를 돌이켜 죽장(竹長) 가까이에 이르니 척후가 적병이 오고 있다고 보고하여 입암(立巖) 앞 작은 고개에 복병하여 기다렸는데 적병이 오지 않는지라, 해질 무렵 개흥사(開興寺)1)로 들어갔다.
18일에 우포장 김일언이 적의 척후 한 명을 침곡(針谷)2)에서 잡았다. 진영을 안국사(安國寺)3)로 옮겼다. 포항을 점령하기로 의논하고 척후를 해안으로 파견했다.
이종곤 등이 진영으로 들어오니 시기를 놓친 죄를 따져 책임을 물었다. 옥산(玉山) 원촌(院村)4)에 이르니 척후가 돌아와서 포항에 적의 대부대가 주둔해 있어 가벼이 침공하기가 어렵다고 보고하여 회군하였다.
24일에 척후가 적이 영천 관포(官炮)와 함께 자양(紫陽)에 들어왔다고 보고했다. 부대를 둘로 나누어 한 부대는 상구(上龜)5)로부터 검단(檢丹)6)으로 나가게 하고, 한 부대는 신방(新坊)7)으로부터 노항(魯巷)8)으로 나가게 하여 월연(月淵)9) 뒤 언덕에서 적을 포위하였다.
군중에 명을 내려 말하기를 “영천 관포는 죽이지 말라. 그는 우리의 동포다.” 하였다. 홍구섭, 우재룡 등이 왜적 한 사람을 사로잡아 오매 목을 베어 그 머리를 깃대에 걸고, 쓸개를 갈라 이한구와 함께 맛보았다.
강호정(江湖亭)10)을 바라보고 탄식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말하기를 “우리 선조 강의공(剛義公)11)이 임진왜란 때 영천성을 수복하시고 다시 경주성 전투에 뛰어들어 아들 백암공(栢巖公)12)이 순절하였고, 이곳에 정사(精舍)를 지어 후세에 그 업적을 이었거늘 지금 이 지경에 우리 선조의 후손이 어찌 이리 적단 말인가.”
이렇게 개탄함으로서 향토 지사들의 사기를 격동시켰다.
영천을 점령코자 의논하니 참모장 손영각이 나와 말하기를 “지금 무기를 갖추지 못한데다가 탄약이 핍절된 상황이요, 영천은 달성(達城)13)과 멀지 않은 곳인데 적의 대병이 갑자기 들이닥치면 그 예봉을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물러나 주요한 거점을 수비하면서 탄약을 준비한 연후에 진공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하니 모두가 동의하는지라 그 뜻을 따르기로 했다.
어떤 사람이 와서 도찰사 공이 오셨다고 전하는지라 검단으로 돌아가 어른을 뵙고 말하기를 “지금 장졸이 800명이 차지 않았고 무기가 태반이나 부족한데다 탄환이 항시 핍절되니 한번 싸우고는 다시 산골짜기로 들어가서 무기를 준비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그런 연고로 전진이 불가능한데다가 소자(小子)가 작년 가을 이래로 반년이나 신병(身病)을 얻어 지금 관동의 길을 열지 못했습니다. 또 신태호와 서로 연결하여 태호는 수로를 제어하고 소자는 육로로 진격하자 하였는데, 태호가 여러 차례 해안지대에서 패하여 수습할 겨를이 없고 소자 역시 무기 부족으로 산골짜기에서 우물쭈물하다보니 지금 관동으로 나아가지 못하였습니다.”
(계속)
각주)
1) 개흥사(開興寺) - 현, 포항시 죽장면 절골에 있던 절이라 하는데, 죽장면 절골을 검색해보면 가사리, 일광리, 상사리, 침곡리, 감곡리 다섯 마을에 절골이 있으니 어느 마을의 절골인지 모르겠다.
2) 침곡(針谷) - 현, 포항시 죽장면 침곡리
3) 안국사(安國寺) - 현, 포항시 기계면 남계리 운주산에 위치한 절
4) 옥산(玉山) 원촌(院村) - 경주시 안강읍 옥산리 옥산서원이 있는 마을
5) 상구(上龜) - 영천시 자양면 삼구리의 하나, 영천댐에 수몰되었다.
6) 검단(檢丹) - 영천시 자양면 충효리의 옛 지명
7) 신방(新坊) - 영천시 자양면 신방리
8) 노항(魯巷) - 영천시 자양면 노항리, 영천댐에 수몰되었다.
9) 월연(月淵) - 영천시 자양면 용산리 월연마을
10) 강호정(江湖亭) - 영천시 자양면 성곡리에 있는 정자 건축물로 1975년 8월 18일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71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의 의병대장 정세아가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 세운 누각으로 선조 32년(1599)에 지은 후 여러 차례의 보수공사가 있었는데, 지금의 건물은 영천댐 건설공사로 인해 1977년에 현 위치로 옮겨 다시 지은 것이다.
11) 강의공(剛義公) - 정세아(鄭世雅)의 시호(諡號). 임진왜란 당시 영천·경주지방을 되찾는데 큰 공을 세웠으며, 전쟁이 끝난 뒤 국가에서 수여하는 모든 영예를 사양하고, 고향인 용산동에 이 정자를 지어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고 한다.
12)백암공(栢巖公) - 정의번의 시호. 정세아의 아들이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버지와 함께 의병을 일으켜 영천에서 승리, 이어 경주에 진격하여 싸우다가 좌장군 박진(朴晋)의 패전으로 적에게 포위되어 위기에 빠진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하여 혈전을 벌이다가 적에게 사로잡혔으나, 끝내 굴복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시신을 수습하지 못해 애도하는 시를 모아 무덤을 만드었다. 시총(詩塚)은 영천시 자양면 하절묘역에 있다.
13) 달성(達城) - 대구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