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지역 시의원을 지냈고 현재는 다른 일을 하는 분과 대화할 기회에 ‘영천에도 안 되는 일은 누구한테라도 안 돼야 하고, 되는 일이라면 누구라도 돼야 하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대전제에 의견일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적이 있다.
무슨 일이 생겼을 때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일찌감치 꼬리를 내리고 포기하는 경우와 또 상대가 누구냐에 따라 거침없이 무시하고 지나가 버린다는 이야기를 한 것으로 기억한다. 이것은 내로남불의 또다른 유형이며 위선이다.
위선[僞善]이란 위장된 선, 즉 겉으로만 착한 체를 하거나 거짓으로 꾸미는 행동을 말한다.
본래 인간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이기적 욕망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그것을 좇는 게 정상이고 인간적이다.
우리 중에 권력 가지기 싫은 사람 누구며, 부자 되기 싫은 사람 과연 그 누구인가. 성공의 욕망, 부자가 되고 싶은 욕망, 그리고 타인을 이기고 지배하려는 욕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본성이다.
따라서 어쩌면 그것은 순수의 발로이며, 약간의 논리의 비약일지라도 인류를 발전시키고 인간에게 풍요를 안겨다 준 원동력일지도 모른다.
이런 가치관이 오히려 솔직하고 매력적이라고 느낄 때가 있으니 그것은 평소에 도덕군자요, 정의의 화신이요 공정주의자인 척 하던 이가 이유야 어떻던 위장전입을 했고, 부동산 투기를 했다는 사실이 밝혀질 때다.
대중들 앞에서는 온갖 미사여구를 구사하며 떠들어대던 이들이 뒷구멍으로는 시정잡배, 양아치보다 못한 탐욕을 보였으니 얼마나 추한 꼴인가. 우리는 이런 위선적인 도덕군자보다 차라리 솔직하고 인간적인 건달이 낫다고 치부해 버린다.
고백하건대 이런 말을 하는 나 또한 저 벼락 맞을 위선자 무리임을 너무나 잘 안다. 대단한 고백도 아니지만 글로 밥을 만드는 내 삶은 글만큼 정의롭거나 착하지 않다.
유독 글에만 정의의 모습을 띠고 정의의 향이 날 뿐이다. 그 속을 들여다보면 아마 독자들은 기절초풍에 까무러칠 것이다.
그래서 글 쓰는 일이 점점 힘들다. 내게도 착한 구석이 있다면 그것이 어릴 때부터 배우고 익혀 잘 삭여진 내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타인들로부터 착하다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희미한 욕망에서 행해지는 연기 같은 것이다.
물론 자기 합리화겠지만 어쩌면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비슷한 생각은 아닌지 물으면서 위안을 삼는다.
얼마 전에도 인사청문회를 했지만 우리 사회의 그나마 좀 배웠다는 고위층 사람들도 도덕성으로 따지면 나보다 훨씬 비교 우위에 있는 사람은 그다지 없더라는 사실로 위안과 반성의 계기로 삼으려 한다.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법과 규범을 지키려고 하는 이유는 남들도 모두 잘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거꾸로 남들도 안 지키는데 뭣하러 나만 지키랴 하는 마음도 있다.
도덕적 선택, 또는 갈림길이 되는 것이 내면에 녹여진 자신만의 도덕성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행동을 보면서 상대적으로 자신도 맞추려는 조건적 선택을 한다.
다시 말해 남이 착하게 행동한다고 믿으면 자신도 선한 척 하고 남이 법과 규범을 제대로 지키지 않는다면 그것을 혼자만 지켜서는 상대적으로 뭔가 손해를 본다는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이런 문제들은 의식 수준의 문제다. 남이 빨간불일 때 간다고 나도 가는 사회는 후진국에서나 하는 행동이다. 시민의식이 높아지고 선진국일수록 법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문제가 된다.
우리는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에서 서로 어울려 사는 것이지 야수의 얼굴로 약육강식으로 살고 있지는 않다.
그런데 인간 본성의 저 밑바닥에는 탐욕을 좋아하고 즐기려는 마음이 깔려있다. 사람의 얼굴로 웃는 선함의 위선을 싫어하는 것이다. 동물의 왕국처럼 서로 다투며 경쟁하고 싶은 마음이 있다. 하지만 이런 사회가 되면 인간의 신뢰가 없는 세렝게티가 된다.
지금 우리 사회의 위선에 대한 비판이 뜨겁다. 사람은 원초적으로 위선적이다. 하지만 권력의 위선은 용서받을 수 없다. 시민들을 속여 얻은 권력으로 위선을 내보인다면 그것은 결국 악을 탐했던 거다.
우리가 위선 속에서 살아가는 이유, 그것은 결국 인간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