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5월이다. 6월1일 의병의 날을 전후하여 추모식과 백일장·사생대회를 거행해야 하는데 코로나19가 발목을 잡는다. 추모식 자체로 선열들을 위로하는 행사이긴 하지만 이를 계기로 삼아 다양한 선양사업을 추진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입장에서 가슴이 답답하다. 백일장·사생대회를 치를 수 없다면 공모전이라도 해서 관심을 유발시켜 보려 한다. 이 글을 읽으시는 독자가 있으시다면 산남의진을 선양할 좋은 아이디어를 주시면 얼마니 좋을까 하고 기대해본다. 정용기(鄭鏞基) ⑦ <山南倡義誌 卷下 25~27p> 도찰사 공이 이르기를 “을사년 이후로 국가존망의 위기가 경각에 있거늘 준비가 완전하다느니 불완전하다느니 어물쩡거릴 새 없이 그 곳으로 전진할 때이니 오직 북상의 계획을 정하라.” 하니 소모장 정순기가 앞으로 나서 말하기를 “지금 각지의 따르고자 하는 이들이 아직 입진하지 못하였고 가을 추위가 점점 심해지는데 장졸이 의복이 얇으니,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빨리 입진하게 부르고 군복을 갖춘 후에 행군함이 옳습니다.” 하였다. 이에 진영을 보현산 좌우 각 마을에 머무르게 하고 의복준비와 장병 모집 중에, 적병이 검단에 와서 촌락에 방화를 한다는 전언이 왔다. 급히 군사를 일으켜 그곳으로 쫓아가니 적이 산속 길을 따라 패주하여 도망했다. 돌아와서 촌락을 살피니 가택과 서책 등이 모두 불타버리고 이웃집도 서너 호나 불이 붙었다. 여러 사람이 모두 말하기를 “지금 적이 여러 차례 패하여 멀리 도망하니 이틈을 타서 군복을 갖추어 북진함이 옳습니다.” 하매 종사(從事)를 각지에 파견하여 따르고자 하는 이들을 부르고 또한 각 군영의 장수에게 각기 그 부하들을 인솔하여 군복을 준비해서 북상하라 명하여 각지로 파견하였다. 그리고 친히 여러 장령들 이하 100여 명을 인솔하고 죽장(竹長) 등지에서 소모(召募)활동을 하면서 매현리(梅峴里)에 들어가서 유숙하니 때는 8월29일이었다. 다음 날 아침 때 아닌 비바람과 천둥번개가 일어나 장수깃발 2대가 부러져 땅에 떨어지니 군중이 모두 경악하여 어지러이 안정이 되지 않는지라, 큰 소리로 꾸짖어 말하기를 “옛날 오나라가 초나라를 정벌할 적에 장수의 깃발이 전복되어 군심이 술렁이자 손무가 말하기를 장군의 깃발이 넘어지면 대장이 죽는다 하니 내가 그것에 대답하리라 하고 마침내 초나라를 정벌하였다. 손무가 비록 죽었으나 오나라 군대가 초군을 대파하고 초나라의 서울인 언영(郢)으로 들어갔으니 깃발이 넘어진 것은 대승(大勝)의 조짐이다.” 하니 군심이 차츰 안정이 되었다. 이날 군문집사 이두규와 우포장 김일언이 사사로이 다투어 군법으로 죄를 다스렸다. 해질 무렵 척후가 적병이 청송으로부터 죽장 창리(倉里)에 이르렀다고 보고하였다. 이 때는 제군(諸軍)이 아직 모이지 않아 오직 김일언, 우재룡, 이세기 세 사람의 부대만 매현에 있는지라, 우재룡에게 작령(雀嶺)에 복병하라 하고, 김일언은 명암(鳴巖)에 복병케 하고 이세기는 광천(廣川)에 복병케 하면서 모두에게 분부하기를 “적이 필시 입암에서 유숙할 것이다. 내가 내일 이른 새벽에 진공할 것이니 그대들은 움직이지 말고 기다렸다가 그 돌아갈 길을 차단하면 전부를 붙잡을 수 있을 것이다.” 하고 부대를 나누어 파견했다. 이 때 이세기가 부하들을 인솔하여 광천으로 가면서 입암을 살펴보니 적이 한 곳에서 밥을 먹고 있는데, 불빛을 따라 살펴보니 그 수가 많지 않았다. 이세기는 평소 담력이 용맹한 사람이라 전공을 얻고자 하는 욕심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였는데, 인근에 잠복해있던 적이 포성을 듣고 급히 돌아와 오히려 이세기군을 포위하니 세기는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아 간신히 탈출하였다. 매현에 있던 대장은 뜻하지 않은 포성을 듣고서 군기가 누설되었으리라 짐작하고 행군하려 독려하는 차에 누군가 보고하기를 “전초부대가 적과 교전하였는데 승부가 불분명합니다.” 하거늘 급히 입암에 이르니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라 군사를 지휘하기도 전에 적탄이 비 오듯 쏟아진다. 있는 힘을 다해 싸웠으나 이한구, 손영각, 권규섭과 함께 동시에 순절하니 때는 광무 11년 정미(丁未:1907) 9월 초하루였다. 정순기, 이세기, 우재룡 등이 흩어진 군대를 수습하여 대장의 장례를 성원(城院) 뒤 언덕에 치렀는데, 명정(銘旌)에는 ‘산남창의대장정공지구(山南倡義大將鄭公之柩)’라 하였다. 전군이 도찰사공을 기다려 붙좇았다. (정용기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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