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창의지에는 정환직, 정용기 대장 다음 순서에 이한구 선생을 배치했고 많은 지면을 할애하여 그 활동상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창의진영에서 중군장으로 임명되어 정용기 대장이 적에게 붙잡혀 옥중에 있는 동안 진영을 통솔하였다. 정용기 대장이 대구 옥살이 하는 동안의 상세한 활동상을 지금 소개하는 이한구 조(條)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한구(李韓久) ② <山南倡義誌 卷下 29~31p>
윤달 4월10일에 강구(江口)1)를 야습하여 왜적 몇을 죽이니 남은 자들이 모두 바다로 도주했다. 군사를 상옥(上沃)2)으로 물리니 뒤를 쫓는 적이 있는지라 잠복하여 기다렸는데 적이 남쪽으로 달려 청하(淸河)로 갔다.
한 떼의 병사[일지군(一枝軍)]를 시켜 각지에서 의병을 불러 모았다. 그때 남석우(南錫佑)가 청송옥에서 오랜 구금 끝에 석방되었다는 정보가 있는지라 정래의(鄭來義)를 보내어 그를 불러왔다.
병암(屛巖)3)에 이르니 적이 추격해오는지라 군사를 돌려 몰아가니 적이 도망갔다.
다시 영덕으로 향할 새 산성리(山城里)4)에 이르러 한 떼의 병사가 이현(泥峴)5)에서 적과 맞닥뜨려 포성이 크게 일어나는지라 산 위에 깃발을 세우고 병사가 많은 듯이 속이고 군사를 독려하여 적을 몰아세우니 적이 이전평(梨田坪)6)으로 물러났다.
삼 초장(哨長) 임춘실(林春實)이 자주 민간을 노략질한 죄가 있는지라 군법으로 그를 참(斬)했다. 김건칠(金建七)을 의성으로 보내어 군사를 모으고 다시 주방산으로 들어갔다.
정래의가 영해로부터 청하에 도착하여 정진학(鄭鎭鶴)을 보내어 보고하기를, 신태호 부대의 패전소식과 남석우가 청하를 습격하고서 이경구(李景久)와 합군하여 청량사로 갔다 한다.
도총장 김원서를 시켜 민간에 군량을 모집해오게 하였다. 내완산(內宛山)을 넘을 때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산과 바다는 모두 이렇게 견고한데 나라는 스스로 지키지 못하니 나라에 사람이 없음인가.” 하고 눈물을 흘리니 좌우가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이경구가 병사를 모아 돌아와서 남석우, 이종곤(李鍾崑) 등은 보현산 등지에서 소모활동을 하고 있다고 전하였다.
26일에 정순기가 사람을 보내어 대구 옥중에 있는 정대장의 밀명을 전하기를 ‘최면암(崔俛菴)7)은 호남(湖南)에서 붙잡혔고 민종식(閔宗植)8)은 홍주(洪州)에서 패전하였으며, 달성(達城)은 바야흐로 수비가 없으니 만약 천여 군사로 습격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이다.’ 한다.
남석우가 적의 척후병 하나를 죽였다. 5월 초하루에 본진이 간산(間山)9)에 회군했다. 다음날 정순기가 달성으로부터 내려와서 대구옥의 일에 대해 머지않아 석방될 것이라 하였다.
앞서 참모장 손영각(孫永珏)이 병으로 귀가하고 이형표(李亨杓)가 천거되었는데 얼마 되지 않아 그 또한 중상을 입어 귀가하였다. 다시 의논하여 부서를 정하니 정순기가 선봉장이 되고, 정래의가 참모장이 되었다. 김건칠에게 시기를 어긴 죄에 대한 책임을 물었다.
이경구가 안덕 등지에서 소모활동을 하다가 적에게 포위되어 총탄을 맞음에 정순기와 이세기를 시켜 몰아가니 적이 도주하여 청송읍으로 들어갔다. 다음날 군의(軍醫)로 하여금 이경구의 상처를 치료하고 집으로 보내며 위로하되 “선비가 의롭게 죽는다면 무슨 한(恨)이 있으리오.” 하다.
(계속)
각주)
1) 강구(江口) - 영덕군 강구면
2) 상옥(上沃) - 포항시 죽장면 상옥리
3) 병암(屛巖) - 청송군 부남면 구천리
4) 산성리(山城里) - 영덕군 달산면 봉산리
5) 이현(泥峴) - 청송군 부남면 이현리
6) 이전평(梨田坪) -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
7) 최면암(崔俛菴) -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 1833~1906) 선생을 말한다. 호남유생 임병찬(林炳瓚) 등과 손을 잡고 장성 유생 기우만(奇宇萬)의 협조를 얻어 태인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의병을 모집했다. 그의 지휘를 받은 의병부대가 순창에 이르렀을 때에 진위대(鎭衛隊)의 공격을 받아 그는 체포되었다.
8) 민종식(閔宗植) -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정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1906년 5월 홍산에 의병을 집결시킨 뒤 충청남도 서부지역인 서천·비인·판교·남포·보평·청양 등을 점령하고, 서부의 중심지인 홍주까지 점령했다. 이해 5월 31일 홍주성전투에서 의병 83명이 죽고 145명이 포로가 되자, 그는 김상덕(金商悳)과 함께 공주에 있는 이남규의 집으로 피신했다.ㅍ재기를 도모하던 중 1906년 11월 일진회 회원의 밀고로 붙잡혀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법부대신 이하영의 주청으로 진도로 유배되었고, 1907년 12월 특사로 풀려났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9) 간산(間山) - 청송군 현서면 무계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