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오늘은 다시 의병의 날이다. 제11회 대한민국 의병의 날 기념행사는 행정안전부가 주최하고 전라남도와 나주시가 공동 주관해서 연다고 한다.
내용을 보니 ‘우리 모두 의병’을 주제로 출정식에서는 의병 출정식 재현, 의병이 선조에게 보내는 편지 낭독, 초청·시립예술단 공연이 있고, 본 기념식은 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일깨우고자 의병의 날 주제 영상 상영과 환영사, 유공자 표창, 추모사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앞서 오후 2시 나주시민회관에서 ‘의병정신의 역사적 의의와 현대적 계승 방안’을 주제로 각계 전문가가 참여하는 학술포럼을 개최할 예정이다.
나주시는 지난달 16일부터 기념식 당일까지를 의병 기념 주간으로 정해 금성관 일원에서 의병의 날 의미와 의병의 삶을 조명하기 위한 학교별 순회 교육, 각종 체험, 전시, 홍보부스 등을 운영해 왔다 한다. 임란의병과 항일의병의 정신이 전국 어디에도 뒤지지 않는 우리 영천은 언제쯤 이런 행사를 유치할 수 있을까?
이한구(李韓久) ③ <山南倡義誌 卷下 30~32p>
다시 영덕을 향해 진군하여 상마산(上馬山)1)에 이르렀는데 큰 비가 와서 도로가 막힌지라 하산하여 주방(周房)으로 되돌아오니, 신태호가 종제 신태종과 김종필을 보내 패전의 소식을 전하면서 합세하자고 하여 허락하였다.
11일 정미(丁未)2)에 영덕읍으로 들어가 일어학교를 부수고 교사 원씨(元氏)를 잡아 하변이(夏變夷)의 죄3)를 물어 책망하고, 군수 이씨를 불러 월남망국지사(越南亡國之事)4)로 타이르니 그도 탄식하였다.
병장기 등을 거두어 회군하였는데, 남석우가 군수를 구속하자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더니 이 결정에 불만을 품고 그 부하를 인솔하여 먼저 청량사로 들어갔다. 다음날 율림시에 도착하여 도총장(都摠將) 김원서를 시켜 남석우를 붙잡아 군법으로 다스리려 하다가 소모(召募)의 공이 있어 특별히 용서하였다.
김원서가 나서서 주왕산에 복병하였다가 불의에 청송을 습격하면 반드시 전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의견을 내었으나 대부분이 의구심을 갖는지라 그만두었다. 다시 청하(淸河)를 향하여 진군하다가 덕성(德城)5)에 이르니 마을 주민들이 쇠고기와 술로 위로하였다.
저녁나절에 적 백여 명이 갑자기 들이닥치거늘 군사를 나누어 산으로 올라가 협공하니 적이 패주하였다. 비바람이 불어 부득이 쫒지 못하고 하산하니 적의 시체가 여럿이었다.
15일에 종사(從事) 오두환이 영해로부터 돌아와 “신태호군이 적에게 도로를 빼앗겨 남하하지 못하고 대부분 무너져 흩어졌으며, 적 수백 명이 청송으로부터 우리를 쫓아오고 있다.”고 보고하였다.
이때에 청송부사가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군민들에게 훈유(訓諭)하기를 “일본의 보호를 받는데 있어 의병의 장난이 방해가 많다.” 하고 자신의 신변을 지키지 못할까 두려워 날로 4,5백 명의 병정을 증강시키고 의병을 탄압하니 세(勢)를 떨치지 못하게 되었다.
홀로 헤아려 잠시 휴병(休兵)하는 것이 옳다고 판단하고 대중들과 의논하여 말하기를 “지금 적의 대군이 당도하니 죽는 것밖에 도리가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인심이 돌변하여 의병을 국가의 방해라 하니, 우리가 지금 죽는 것은 영원히 이름 없는 원통한 죽음이 될 것이다. 또한 정용기 대장이 머지않아 돌아온다 하니 대장의 귀환을 기다려 다시 거병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하고 상옥에 도착하여 해산하여 보내면서 “잘 보중(保重)하라. 오래지 않아 다시 모이리라.” 하니 모두 눈물을 참지 못하면서 헤어졌다.
동생 순구를 집으로 돌려보내고 그날로 대구로 가서 옥중의 일을 수소문하니 대장이 곧 석방되리라는 소식이다. 세상인심을 정찰하고자 충청도로부터 서울을 거쳐 다시 관동(冠童)을 돌아보니 세상에 사람 없음이 난감할 뿐이다.
검단으로 돌아와 정 대장을 만나 운수가 맞지 않음을 통설(痛說)하고 첩설(妾說)이란 글을 지어 세상을 개탄하였다. 정대장의 병으로 즉시 거병을 못하고 각지로 연락하여 북동대산과 보현산의 저장은 남석인, 이세기 등에게 맡기고, 청송으로 가서 서(종락), 김(원서) 등에게 부탁하였다.
흥해로 돌아가서 최(세윤), 정(래의) 등을 부르고 서쪽 영천 화남으로 가서 이성활을 만나고서 검단으로 돌아오니 여러 벗들이 모두 와서 모였다. 또 각지에 제씨(諸氏)의 후원을 받고자 글을 부쳤다.
다시 행군하는 날에 중군장의 직책을 맡아 안팎 대소사를 찬획(贊劃)하지 않음이 없이하면서 정대장과 침식을 함께하다가 동시에 순절하니6)어찌 하늘이 내린 운명이 아니랴. (끝)
각주)
1) 상마산(上馬山) - 영덕군 달산면 옥산리
2) 11일 정미(丁未) - 음력 5월11일, 양력 1906년 7월 2일에 해당하는 날. 본문의 月은 日의 오기인 듯.
3) 하변이(夏變夷) - 하나라, 곧 중국의 풍속과 문화를 오랑캐의 풍속으로 변화시킴
4) 월남망국지사(越南亡國之事) - 월남망국사(越南亡國史)는 베트남의 판보이쩌우와 중국의 량치차오의 대화를 기록한 것으로 월남이 968년 중국에서 독립한 뒤 프랑스의 보호국이 되기까지의 이야기와 1885년 이후 활약한 애국지사들의 일대기, 월남의 장래에 대한 대화 등이 주요한 내용이다. 1906년 대한 제국의 애국 계몽 운동가 현채가 국한문혼용으로 번역하여 간행하였다. 현채는 월남망국사를 통해 월남의 멸망이 결코 남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독자들에게 인식시키려고 하였다. 또한, 제국주의의 확대의 위협 앞에 놓여 있는 조선의 상태를 비판하고 민중들을 계몽시키려는 의도에서 간행하였다.
5) 덕성(德城) -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련리
6) 음력 1907년 9월1일 입암전투에서 대장 정용기, 중군장 이한구, 참모장 손영각, 좌영장 권규섭 등 19분이 동시에 전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