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 명령으로 일으킨 산남의진
죽음만이 구국이었던 슬픈 역사
/심지훈 한국콘텐츠연구원 총괄에디터
<이학무 걷기학교>는 지난달 9일 경북 영천의 산남의진(山南義陣) 유적지를 돌아봤다. 현장에서 산남의진사(史)를 듣다 보면 전투에는 이기기 위한 전투와 승패를 떠나 싸울 수밖에 없는 전투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목숨 바친 싸움 자체가 구국의 전부인 경우도 있다는 말이다. 산남의진기념사업회 조충래 부회장이 안내와 설명을 도왔다.
1907년 영천 산남의진
호용이라는 아이가 있었다. 그의 나이 열다섯에 아버지를 여의고, 아버지를 여읜지 석 달 뒤 할아버지도 잃었다. 호용의 할아버지는 옥중에서 죽음을 직감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손자 호용을 위해 시 한 수를 남겼다.
집안은 망하고 몸은 이미 갇혔으니
비로소 이런 마음 가진 것이 후회된다
지금 가면 돌아오지 못할 것을 알지만
한 가지 생각은 어린 손자가 있음이라
뒷날의 일이지만 호용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부부처럼 나란히 무덤을 이루었다. 어린 호용이 한 일은 필시 아닐 것이었다. 이네들 무덤 앞에 서니 호용이 먼저 떠올랐다.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없어도 멀쩡하게 이어졌던 아이의 날들….
어쩌면 이길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분연히 일어나 왜놈들이 쏜 신식 총에 속절없이 쓰러져갔을 그 숱한 주검들보다 더 괴롭고 더 아프고 더 한스러웠을지도 모른다. 그런 손자의 삶이 할아버지 눈에는 너무나도 선해 비가(悲歌)처럼 시구가 흘렀으리라.
“호용의 행적은 알고 있습니까.”
“모릅니다.”
“양세(兩世) 대장 후손은 있다면서요.”
“네. 정대영 씨라고 있습니다.”
“허면 그 분 통해 호용의 삶도 쫓아볼 수 있겠네요.”
“네. 그건 또 다른 과제입니다.”
그날 우리 일행을 이끈 사내는 전적지 입암(포항 죽장)에서 114년 전 일을 딴엔 소상히 들려주려 갖은 애를 썼다. 신록이 창취하고 한없이 평화롭기만 한 오늘의 현장에서는 상상하기 힘든 일이었다. 시간이 약이라지만 이 경우엔 막대한 장애였다.
강산이 족히 11번은 변했을 세월 앞에 의병(義兵)의 역사가 마냥 숭고하고 거룩한 것이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이 동하지 않은 채 부러 뱉는 말은 시늉일 뿐이고, 그건 거짓부렁이자 말장난일 뿐이다. 그건 순국 의병들에 대한 예의가 아닌 것이다.
일제가 한반도를 집어먹은 뒷날, 서슬 속에 유림과 생존지사들이 뜻을 모아 지었다는 충효재(1934년 건립). 이곳이 품은 이야기는 이전 것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참전용사 499명의 위패 기운도 기운이려니와 충효재 벽면에 내걸린 1~4차 거병 조직도, 격전사적지, 참전지역명, 선전지역명 현판이 100여 년의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리고 애석하게 다가왔다. 충효재 마당 한쪽엔 산남의진이 꾸려지게 된 사연을 알려주는 홀쭉한 바위가 서 있어 애잔함을 더했다.
그러니까 호용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 거였다.
1905년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군부대신 이근택, 학부대신 이완용, 농상공부대신 권중현 주도로 왜놈과 을사늑약(외교권 박탈)이 체결되자 온 나라에 의분이 들끓었다. 고종은 측근 동엄 정환직을 은밀히 궁으로 들였다.
“경은 화천지수(和泉之水)를 아는가. 짐은 바라노라.”
고종은 이렇게 말하고, 동엄에게 ‘짐망(朕望)’ 두 글자 밀지를 내렸다.
화천은 옛날 제경공 이야기에 나온다. 제경공이 각 제후국의 군사에게 포위를 당해 거의 사로잡히게 될 지경에 이르렀다. 장군 봉추부가 급히 경공의 수레에 뛰어올라 자기 옷을 벗어 경공과 바꿔 입었다.
경공은 말고삐를 잡고 수레의 바른 편에 서게 했다. 이윽고 적장이 다가왔다. 이때 추부가 고삐를 잡은 자에게 소리를 높여 “내가 목이 마르니 급히 화천(和泉)의 물을 떠오라”고 했다. 고삐를 잡은 경공은 이 틈을 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종은 동엄에게 봉추부가 되어 자신을 왜놈 소굴이 된 궁에서 구출해달라는 명을 내린 것이다. 동엄은 눈물을 머금고 물러나 장남 용기를 불러 일렀다.
“아비는 한번 죽음으로써 황은(皇恩)에 보답하고자 하니 너는 집으로 돌아가라.”
용기는 서럽게 울며 말했다.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아버지가 자식을 부리는 것은 의로움의 처음이요, 나라가 있은 후에 반드시 집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