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⑦ 3) 서구 열강이 시기에 유럽 내에서는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고 유럽 밖에서는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다. 1871~1914년의 기간은 유럽에서는 평화의 시대였으나 유럽 밖은 식민지 전쟁이 극에 달한 시대였다.  비스마르크의 훌륭한 외교정책 덕분에 유럽은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유럽 열강들은 대부분 고도의 산업혁명과 경제성장을 이루고 난 뒤 그 성장의 배출구를 해외에서 찾으며 식민지 쟁탈전을 벌였다. 기본적으로 자국의 이익을 최대로 추구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감정은 각국의 식민지 확장정책인 이른바 제국주의 정책에 최대의 지지를 보냈다.  사상적으로도 찰스 다윈(Charles Darwin)의 《종의 기원》에 영향을 받아 `약육강식`, `적자생존`, `사회진화론` 등 매우 공격적인 주장들이 판을 치던 시대였다. 19세기 말 4반세기 동안 유럽 인구는 10년마다 10% 이상씩 증가했고, 산업화는 가속화되어 그 기간에 생산고는 4배 이상 늘어났다. 전기산업 · 화학산업 등 신산업이 등장하고 내연 엔진과 같은 새로운 동력원이 나타났다. 또한 알루미늄, 공기 압축 타이어, 무선전신 등이 새로 등장했다. 군비산업도 급신장하여 세계적인 무기제조회사 암스트롱(Armstrong), 크루프(Krupp), 크뢰조(Creusot) 등 거대 회사가 부상했다. 국가 간 무기 개발과 철도 건설, 군 규모 확장 경쟁도 뜨거워졌다.  어느 열강도 다른 나라가 강해지는 것을 가만히 보고 있지 않았다. 새로운 위력적인 무기를 개발하고 무기생산력을 신장시키기 위한 경쟁은 가속화되고, 전략철도 건설과 군 규모 확장을 위한 경쟁 또한 뜨겁게 불이 붙었다. 영국과 미국을 제외한 모든 나라가 독일식 징병제도를 채택했다.  그리하여 유럽 대륙 내 4대 강국이었던 독일,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러시아는 각각 전시에 동원 가능한 병력이 평균 300만 명이나 되었다. 참모제도도 독일 것을 도입하고 참모장의 권한을 확장했으며 교육 및 훈련도 강화했다. 그와 같이 내부적으로 큰 긴장이 고조되어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열강들은 일단 전쟁을 기피한 것이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외부의 제국주의적 투기장에다 내부의 긴장을 방출하고, 약소 원주민들을 우선 상대하고 강자끼리의 싸움은 다음으로 미루고 보자는 식이었다. 그리고 열강들은 이탈리아와 독일 통일 문제 때문에 중단된 해외진출정책을 다시 가속화하였다.  유럽인들에게 주요 배출구가 된 곳은 아시아 · 아프리카 · 발칸 반도였다. 그 가운데 아시아 무대에서는 유럽 세력에 미국과 일본도 끼어들었다. 식민지 쟁탈전에 참여한 나라는 영국 · 프랑스 · 러시아 · 네덜란드 · 포르투갈 · 독일 · 이탈리아 · 벨기에 · 스페인 · 미국 · 일본 등 11개국이었고, 이 가운데 영국 · 프랑스 · 러시아는 일찍부터 꾸준히 식민지를 확장해왔고, 독일 · 이탈리아 · 벨기에 · 미국 · 일본 등도 뒤늦게 식민지 쟁탈전에 뛰어들었다.1898년 아프리카와 아시아로 진출한 영국의 대륙종단정책과 프랑스의 대륙횡단정책이 아프리카 수단에서 충돌하는 파쇼다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당시 프랑스에서는 드레퓌스 사건에 대응하느라 군대를 파견할 수 없었으므로 전쟁을 회피했다. 한편 러시아는 중앙아시아, 동아시아, 발칸 반도 등으로 진출을 시도했으나 러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한 후 다시 유럽으로 방향을 바꾸고 발칸 반도 범슬라브주의의 중심이 되었다. 그리고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한 범게르만주의와 대립했다. 독일은 비스마르크가 실각한 후에 빌헬름 2세가 채택한 신항로 정책에 따라 아시아, 태평양 제도, 동아시아, 발칸 반도, 터키 등으로 진출을 도모했고 아프리카에서는 모로코의 분할문제를 둘러싼 국제분쟁인 모로코 사건이 두 차례 발생했다.  또한 독일의 베를린, 비잔티움(이스탄불), 바그다드를 철도로 연결하려는 3B정책과 카이로, 케이프타운, 캘커타를 잇는 지역을 지배하려는 영국의 3C정책이 대립했다.미국은 1890년 프런티어의 소멸을 계기로 제국주의 정책을 내세워 카리브해 지역으로 진출했고, 1898년에는 미국-에스파냐 전쟁에서 에스파냐를 무찔렀다. 미국은 에스파냐를 상대로 강화 조약을 맺고 카리브 해에 위치한 쿠바를 독립시켜 보호국으로 삼았다. 또, 푸에르토리코를 획득했다.  그와 동시에 필리핀과 괌을 에스파냐에게서 빼앗고 당시 독립국이었던 하와이를 병합했다. 이로써 미국은 태평양을 횡단하여 중국으로 건너가는 기항지를 확보했다.중국은 청일전쟁에서 패한 후 열강들의 반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러시아, 독일, 영국, 프랑스, 일본이 광산채굴권, 철도부설권 등 다양한 형태로 중국을 집어삼켰던 것이다. 뒤늦게 중국에 진출한 미국의 국무장관 존 헤이는 1899년 중국의 문호개방을 선언했다. 사실 미국은 중국 분할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으며 오직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원했다. 미국의 이러한 방침은 한발 늦게 중국에 진출한 일본과 대립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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