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⑭ 군사장 허위의 작전 계획에 따르면, 일본군의 방위망을 뚫기 위하여각 군이 분산 진격하여 동대문 밖에서 집결, 성내로 진격하여 들어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일부 의병군은 세검정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동대문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미리 대기하고 있었고, 일부는 의병의 선봉 부대를 습격하였다. 동대문 밖의 혈전으로 인하여 서울점령의 꿈은 무산되었으나 열약한무기로 수도 탈환까지 계획한 의병의 대작전은 경탄할만한 일이었다. 의병전쟁은 1908년 이후 1910년까지 끊임없이 계속되었다.[표]의 통계는 일본경찰이 낸 무성의한 숫자이지만 대체의 추세는 알 수 있다. [표]의 통계로 미루어 제2차 의병전쟁은 주로 강원·경기이남[전투 횟수가 전체의 75.7%(1908년) 내지 88.6%(1909년)를 차지함]에서 전개되었고, 북부 지역에서는 산발적으로 일어났던 것을 알수 있다.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의 의병은 1908년에 총전투 횟수의 24.3%, 1909년에는 11.4%를차지한 데 불과하였다.의병전쟁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전국의 민간인 소유의 총포화기를 압수하였다. 이 때 함흥 관내에서 압수된 신식 소총이 3,144정, 화승총이1,939정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은 총기를 압수당하고 있다. 이 지방에 전통적으로 포수(砲手)가 가장 많았고,신식 소총 역시 많았던 것을 보면,홍범도(洪範圖)·송상봉(宋相鳳) 등의 포수 의병의 활동이 활발했던 배경을 알 수 있다. 이 통계에서 특기할만한 사실은제2차 의병전쟁의 중심지가 처음에는 전라남도·강원도·전라북도·황해도·충청남도·경상북도·경상남도 등지였다는 점이다. 특히, 강원도 의병은 1908년에 가장 강력하였고 1909년에는 전라남도 의병이 강력하였다. 일본군의 공격 역시 처음에는 강원도 의병에 집중하다가 이어 1909년에는 전라남도 의병에 주력하였다. 이 통계가 보여주는 또 하나의 특징은 1908년의 전투 의병수가 1909년의 그것보다 2배 이상이나 많은반면, 전투 횟수는 거의 비슷하다는 점이다. 이것으로 미루어보아 1년 사이에 한 전투 당 평균 의병수가절반으로 줄어들었음을 알 수 있다. 즉, 초기에 의병은 대부대가 행동을같이했지만 뒤에는 소부대로 분산되어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 의병이 이처럼 적은 병력으로 분산 활동한 이유는 일본군의 이른바 교반작전(攪拌作戰) 때문이었다고 추측된다. 교반작전이란 토벌군을 세분하여 한정된 국지(局地)에 교반적 수색을 실행하고, 전후좌우로 몇 번이나 되풀이하여 왕래하거나 기병적(寄兵的)인 수단을 써서 의병을 현혹시키는 작전을 말한다. 이같은 일본군의 작전 변경에 대응한 의병들은 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유격전을 벌여야만 하였다. 그러나 이 때문에 초기에는 의병의 대부대가 지방 중요 시·읍의 공격·점령에 성공한 데 반하여, 후기에는 차츰 산간벽지로 물러서서 일본군을 기습하는작전으로 만족해야만 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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