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남창의지 해제(解題) ⑱ 새해 벽두, 마침 매일 카톡을 통해 글밥을 배달해주고 있는 심지훈 작가의 600자 글이 마음에 닿아 소개해본다. 김순진 시인의 단추라는 시를 해설한 내용이다. <단추 /김수진> 사람의 첫 단추는 어디일까 / 출생일까 / 부모의 결합이 자신의 처음이 아닐까 / 학교의 졸업을 첫 관문이라 할 수 있을까 / 첫 직장일까 / 본인의 결혼일까 인생의 첫 단추는 내가 가고자 한 길을 / 처음 시작한 날이 아닐까 / 나는 글을 쓰며 살고자 꿈꾸어 왔으니 / 그 꿈이 있던 열다섯에 첫 단추를 꿴 것이 아닐까아니다 / 나의 첫 단추는 지금이다 / 나는 지금부터 / 나로 말미암아 나를 아는 누구든 기뻐하며 / 누구든 해가 되지 아니하며 / 나로 하여금 그가 득 되게 도와주며 살리라 / 그리하여 늘 새로운 단추를 꿰리라 / 육(肉)과 영(靈)을 다하여 [해설] 산다는 건 자기만의 세상 독법을 ‘가지는 것’이 아닌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네 삶은 어느 때가 되면 저절로 성(自然性)을 위반하는 각자의 당위성(當爲性)을 응당 지닌다. 그 ‘어느 때’는 수능을 앞둔 고3 일수도, 군대를 전역한 뒤 일수도, 첫 직장을 입사해 일수도, 결혼을 해서 일수도, 아이를 낳은 뒤 일수도, 부모님을 여읜 뒤 일수도 있다. 어떤 이는 기구한 운명 탓에 훨씬 일찍 그런 ‘당위성’을 양어깨에 짊어지고 살아가기도 한다. 이런 심각하고도 중차대한 당위성 말고도 자기만의 세상 독법을 여느 때와 달리 숙고하는 때가 바로 한 해의 들머리일 게다. 우리 지금 첫 단추를 꿰자. ‘육과 영을 다하여 아는 누구든 기뻐하며 득 되게 도와주며 살자.’/ 심보통 2022.1.2. 임인년 입새.오늘은 2022년 1월3일 월요일, 영천국립호국원에 다녀왔다. 채널경북 시무식을 겸한 연례행사다. 의미를 부여하자면 이곳에 잠들어계신 호국영령들께 참배하고 올 한해 살림살이의 의지를 다지는 의미겠다. 한 기관이 굳이 이곳에서 한해를 출발하는 것은 참여한 개인이나 그 기관의 운영기조 최우선에 나라를 둔다는 것이리라. 두 달 전에 대전국립현충원에 아버지 유해를 안장한 지라 개인적으로는 감회가 남달랐다. 지금, 산남의진 선양을 내 사회활동의 최우선과제로 두고 있기에 호국원 참배에 앞서 충효재에 들러 산남의진선열 영위(靈位) 전에 인사를 드렸다. 목숨을 바쳐 대한민국 건국의 초석이 된 구한말 의병들의 천양(闡揚)과 추모사업은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주어진 매우 특별한 과제다. 너무 늦기 전에 말이다. 바. 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 의병전쟁은 종래의 한국 근대사 서술에서 자칫 과소평가되는 경향이 있었다. 일제 식민주의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적 입장에서 근대사를 서술한 역사가들마저 의병전쟁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것은 의병전쟁이 유생들에 의하여 주도되었고, 전투구호가 반근대적이고 봉건주의적이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광복 후 신민족주의라는 입장을 표방하여 『국사대요(國史大要)』를 쓴 손진태(孫晋泰)마저도 의병을 거의 언급하지 않거나 아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그 대신 독립협회나 애국계몽운동을 이 시기의 가장 중요한 민족 운동으로 대서특필하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의병이 표방한 구호에 지나치게 구애되어 그 실질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의병전쟁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집약할 수 있다. 첫째, 의병전쟁의 주도층인 유생과 농민은 일제 침략자와 그에 협력한 소수의 집권자들에 대한 최대의 저항자로서 항일민족세력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구실을 하였다. 당대에서 일제 침략 최대의 희생자인 농민과 농촌 지식인의 정치적 불만을 집약한 의병전쟁은 일제 3 6년 동안에 전개된 항일민족운동의 역사적 뿌리로서 그 의미가 자못 컸다. 둘째, 3·1 운동, 그리고 1920년대와 1930년대에 줄기차게 전개된 농민운동이 모두 한말 의병전쟁을 비롯한 항일운동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70년 동안에 걸쳐 산발적으로 전개된 농민운동에서 일관된 농민적 요구를 읽을 수 있고 또 읽어야 할 것이다. 셋째, 의병전쟁이 항일민족운동의 두 전략 노선인 독립전쟁노선과 독립평화노선 가운데 전쟁노선에 끼친 영향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교육·언론·외교 등 계몽주의적 평화노선이 자주 독립에의 첩경이라 확신했던 독립협회·애국계몽운동, 그리고 문화운동의 계열에 맞선 독립전쟁노선은 의병전쟁에서 시작되어 독립군운동·광복군운동으로 이어졌다. 안중근을 비롯한 한말 무장투쟁과 대한광복회·의열단·애국단 등의 국내외 항일 무장투쟁 역시 독립전쟁의 한 전략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독립전쟁에 참여한 항일운동자들은 적든 많든 의병 정신과 반계몽주의적 사상 및 감정을 품고 있었다고 가정할 수 있다. 또, 그들은 일제 침략 최대의 희생자인 한국 농민의 분노와 한(恨), 그리고 정치 이상을 간직하고 있었다. 일제와의 어떤 타협주의도 배격하고 또 열강에의 어떤 의리주의도 매국 행위로 간주한 한국 독립 운동자들의 확고부동한 신념과 의지는 의병전쟁에서 비롯된 것이며, 완전 자주 독립이라는 명제로 요약된 것이었다.[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병(義兵))](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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