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눈부시다. 봄비도 넉넉히 내렸고 바야흐로 봄이다.
꽁꽁 언 땅을 비집고도 새싹들이 어린애 입안에 돋는 이처럼 뾰족이 돋고, 꽃은 피어 뿌연 먼지 속에서도 봄바람에 살랑거린다.
앙상한 가지에서연초록 싹이 트고 꽃망울이 열린다.“새끼들에게 줄 풀벌레 잡아오던/지빠귀를 새매가 나꾸어 갔다/가까스로 허물 벗고 날개 말리던/잠자리를 물총새가 꿀꺽 삼켜 버렸다/오전에 돋은 새싹을 다람쥐가 갉아먹는다/그러나 어느 유족도 복수를 꿈꾸지 않는다/다 먹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한없이 슬퍼도 적막한, 푸른 숲 속의 일이다.”
시인 반칠환의 ‘먹은 죄’라는 시다.
먹고 먹히는 일은 자연의 법칙이다. 먹이사슬이라고 불리는 자연이 있고 약육강식의 동물의 세계도 있다.
그렇지만 자연을 유심히 관찰해보면 공동체가 숨 쉬고 살아가는데 일정한 법칙이 있음을 발견할 수있다.
그 옛날 이 장면을 유심히 바라본 이의 이야기가 불경에 나온다. 왕이 밭을 갈아 모범을 보이며 풍년을 기원하는 파종제 날. 왕의 쟁기는 금으로, 신하들의 쟁기는 백여덟 개보다 한 개가 적은 은으로 만든 쟁기였다. 왕이 쟁기를 몰고나가자 신하들도 출발했다.
그런데 들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몸은 수척해 뼈만 남아 있었고, 햇볕에 등이타서 벌거숭이 몸이 먼지와 흙투성이가 되어 헐떡거렸다.
소들도 채찍으로 얻어맞아 살이 터지며 멍에에 목이 졸린 채 고삐로 코를 꿰여 피가 흘러내리고 가죽과 살이 터지며 까지 쟁기를 끌었다.
화려함과는 진정 거리가 먼 지옥 같은 그 현장의 쟁기질에 흙이 뒤집히자 벌레들이 꼬물거리며 나왔다.
그러자 새들이 앞다투어 날아와 그것들을 쪼아 먹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골똘히 바라보는 열두 살짜리 소년이 바로 그 나라의 태자였다.
그는 마음이 아팠다. 태자는 결국 자신의 애마 칸타타를 타고 파종제 자리를 빠져 나와서 깊은 숲으로 들어갔고, 숲을 조용히 거닐면서 “이러한 고통을 해결할 방법은 없단말이냐”라며 잠부나무 아래에 앉아 고민했다.
누군가는 호화롭게 살고, 누군가는 벌거벗고 땡볕 아래에서 밭을 가는 농부로 살고, 누군가는 코뚜레가 꿰여 채찍질을 당하는 소로 사는 모습이 그를 아프게 했다.
살아있는 것들끼리 잡아먹고 잡아먹히는 참혹한 생사의 먹이사슬은 그를 고행에 들게 했다. 이것은 석가모니의 유년 시절에 얽힌 일화다.
반칠환 시인의 ‘먹은 죄’는 열두살 소년 싯다르타가 몇천 년 전에 느꼈음 직한 감정을 순간적으로 지금의 우리에게 심어주는 의미있는 시다.
시인이 숲에서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 싯다르타가 열두 살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해 보인다. 그러한 연민의 감정에서시도 태어나고 종교도 태어나는 것일까.
자연과 인간이 함께 지구 위에서 공존하듯 인간들끼리 뜻은 달라도 함께 하는 공동체 안에서는 서로 도우며 함께 살아가야 한다.
갑질도 없고, 돈과 권력이 횡행하지 않는 살기 좋은 곳, 영천을 다른 도시보다 더 인간미 넘치는 놀라운 곳으로 만들어 보자.
먹은 죄가 있는 사람이야 당연히 푸른 숲을 위해 조용히 있어야 하지만 먹은 죄 없는 힘없는 이들이 이유 없이 허투루 먹히는 사회는 만들어지지 않아야 한다.
자연의 법칙, 이를테면 생태계에는 먹고 먹히더라도 상식이 통한다. 그러나 인간계에는 하지 말아야 할 짓을 하고도 당당하고, 또는 강한 것이 옳다거나 힘을 무기로 삶는 사람이 있다.
이것은 자연의 법칙, 즉 상식이 아니다. 어떠한 주장과 요구도 다수의 구성원이 인정하는 상식적 선에서 이뤄지는 사회가 돼야 한다.
새 대통령이 ‘무너진 공정과 상식을 최우선으로 회복 시키겠다’고 했으니 취임을 앞두고 기대가 크다. 그래서 우리 발디딘 이 곳도 꼭히 법으로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으로 공정한 사회, 상식이 통하는 사회가 되기를 기대하게 된다. 그것만이 강한 나라로 가는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