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태수 영남대학교 교수 “호수 도학의 지향가치와 그 현대적 의미” 호수 정세아는 임진란 의병장으로 알려져 있고 실제로 전란이 발발하자 영천에서 가장 먼저 의병을 규합하여 왜적과 맞섰다. 그러나 그가 의병장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호수는 78세의 일생에서 의병장이던 3년 정도를 제외하면 75년 중의 대부분을 도학에 매진했다. 그 근거는 ‘호수선생실기’에 잘 나타나 있다. 호수는 선현들의 가르침에 의거해 도학을 생활화 하는데 진력했고 ‘호수선생실기’에서 그의 삶의 궤적을 짚어 볼 수 있다. 그중 자호와 정자명, 퇴계학맥, 옥산서원, 교우관계, 임고서원, 도학 용어, 도문관 등 일곱가지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자호와 정자명은 한국 도학의 큰 위상을 차지하는 김숙자의 호가 ‘江湖’와 ‘江湖散人’ 인 것에서 자신을 ‘江湖叟’라는 자호를 택하고 ‘江湖亭’이란 정자명을 썼다. 또 부친인 노촌공이 퇴계의 직전제자이고 부친으로부터 학문을 배웠기에 퇴계학맥과도 연관이 깊다고 추정한다. 부친은 실천윤리에 치중하는 도학을 배웠을 터이고, 그 아들인 호수에게 경전의 의리와 행위규범의 실천 방법을 가르쳤을 것이기 때문에 인과 의를 실천하는 도학자일 거라고 본다. 퇴계가 회재 별업을 모방하여 도산 공간을 도학적 이상향으로 구축하니, 옥산을 도학적 이상향의 본산이라고 보고 도학에 뜻을 둔 근동의 인사라면 누구나 옥산에 가서 도학에 힘쓰겠다는 결의를 다졌다. 장현광과 박인로가 그런 인물이다. 호수는 도학 활동을 하기 위해 여러 도학자들과 교류도 했는데, 교류 대상자는 금란수, 류정, 장현광, 조호익 등이다. 호수는 임란 이후 피폐해진 서원을 중창하거나 복원하는 데 앞장 섰는데 67세부터 수년에 걸쳐 영천향교를 복원했고, 68세에는 향인들과 함께 포은 배향지인 임고서원을 도일동에 중창했다. 도문관이란 도학과 문학의 위상에 대한 관점으로, 도학의 위상을 문학보다 더 높게 설정한다. 호수 도학의 지향가치는 의리와 융평의 심화와 확장으로 본다. 의리는 물신주의와 개인주의에 찌든 현대적 의의로 보면 바로 이를 버려야 의가 보인다는 것이다. 의리와 이익은 상극이다. 의리가 있으면 이익이 없고, 이익이 있으면 의리가 없으니 분노를 잘 관리하고, 세상을 탓하기 전에 자기 욕망을 먼저 탓해야 하며, 조건 없이 의리를 실천하라고 한다. 융평은 IMF 이후 양극화 사회에서 大同과 小康을 꿈꾼다. ‘隆平’만 실현되면 소강을 넘어 대동으로 진입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호수는 도학과 창의의 두 길을 걸었지만 ‘호수선생실기’에서처럼 의리와 융평을 가르치며 대동사회를 꿈꿨다. =우인수 경북대학교 교수 “영천 의병장 정세아의 임란 창의와 구국활동” 정세아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영천지역의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영천성을 탈환하고 경주성 수복 전투에 참전하여 혁혁한 공을 세운 임란 의병장이다. 그는 영천의 노항리에서 태어났고 지산 조호익, 여헌 장현광, 창석 이준, 모당 손처눌과 도의로 허여하였다. 임란시 왜군이 영천으로 들이닥치자 가장 먼저 창의하여 의병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는 강개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맏아들 의번에게 말하기를 “이제 임금님이 파천하셨으니 우리가 어찌 초야에서 편안히 살 것을 구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의번이 아버지의 말씀에 응해서 먼저 여러 아우와 항오를 짜고 격문을 만들어 향병을 소집하였다. 이에 정대임과 정의번이 중심이 되어 조희익·조덕기·조성·이번·정천리·유몽서 등과 정성을 다하여 900여명의 군사를 모집하였다. 그즈음 곽재우는 의령에서, 권응수는 신녕에서 각각 기병하여 서로 성원하였다. 1592년 4월 22일 영천성은 변변한 저항 한 번 하지 못한 채 가토 기요마사가 이끈 일본군 제 2군에게 넘어갔다. 정세아는 정대임과 더불어 영천성을 탈환할 계획을 세웠다. 영천 의병 단독으로는 성공하기 힘든 큰 단위의 전투였기 때문에 인근 지역의 관군과 의병의 협조를 얻어 연합작전을 펴기로 하였다. 이 연합작전에는 신녕 의병장 권응수, 신녕현감 한척, 영천군수 김윤국, 하양 의병장 신해, 하양현감 조윤신, 경주판관 박의장, 의흥 복병장 홍천뢰, 자인 복병장 최문병, 경산 의병장 최대기 등이 함께하였다. 이들은 각자 군사를 이끌고 7월 23일경부터 속속 영천으로 집결하였다. 이때 모인 의병과 관군 총병력은 3,560여 명이었다. 영천 의병진은 읍성 남쪽 추평들에 본부를 설치하고 7월 26일부터 이틀간 영천성 탈환 전투를 벌인다. 치열한 접전 끝에 영천성 내의 관아와 객사를 비롯하여 명원루와 창고 등 거의 모든 건물이 불에 탔다. 천여 명에 달하던 일본군 중 살아서 도망간 자는 수십 명에 지나지 않았다. 말 200필과 총검류 900여 자루를 노획하였다. 포로로 잡혀있던 조선인도 구출하였다. 아군의 피해도 커서 전사자가 83명, 부상자가 238명이었다. 의병과 관군은 힘을 합쳐 영천성을 수복하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 전투는 의병과 관군이 연합하여 얻은 값진 승리로 일본군 보급로를 끊어 일본군에 대한 반격의 신호탄인 동시에 임진왜란의 전체적인 판세 변화에 영향을 끼친 명군의 참전을 이끌어 냈다. 류성룡은 ‘징비록’에서 “영천성을 수복함으로써 일본군이 경주성으로 도망갔고, 이로 인해 신녕, 의흥, 의성, 안동 등의 일본군이 모두 한쪽 길로 모이게 되어 경상좌도 군읍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모두 영천 일전의 공이다”라고 했고, 이항복은 영천성의 수복을 이순신의 명량해전과 함께 가장 통쾌한 승리라고 평가하였다. 이 의병의 창의는 후에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를 거쳐 1728년의 무신란의 창의, 한말 산남의진의 창의에도 영향을 미쳤다. =김원준 영남대학교 교수 “호수 정세아 시의 특징” 호수 정세아의 연구는 의병장으로의 역사적 공과에만 국한돼 있지만 시문을 통한 내면의 진정성을 밝히는 노력은 찾기 어렵다. 이유는 현전하는 그의 시가 호수선생실기에 수록된 총 21제 23수에 불과하다. 남겨진 23수로는 전생애를 통한 시정신이나 가치를 온전하게 밝히는 데는 한계가 있다. 시가 정조와 감동을 간직한 계율적 언어라는 점에서 사람의 마음을 예술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사물의 이치와 형태와 정신을 통찰하고 파악하여 존재 의의를 찾아내는 것이란 점을 고려할 때 호수의 시문학적 정서나 인식이나 세계관을 밝혀내는 데는 어려움이 따른다. 작시 연도의 편중성도 문제인데 실기에 수록된 23수 가운데 작시 연도가 명확한 것은 11제 11수로 1590년부터 1611년까지이다. 11수의 시는 호수의 나이 56세부터 별세하기 전년인 77세까지 지은 것이다. 연도를 추정하기 어려운 20수의 경우도 시제나 내용을 고려할 때 임란 이후에 지은 것으로 본다. 따라서 젊은 호수의 시정신을 헤아려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23수의 시를 통해 본 호수 시의 특징은 ‘충정과 의기’, ‘수도진공과 자연’, 그리고 ‘인간적 정회의 표출’이다. 형식적 측면으로 분류하면, 오언절구 – 1제 1수, 칠언절구 – 7제 7수, 오언율시 – 2제 2수, 칠언율시 – 5제 7수, 칠언장시 – 5제 5수이다. 주제 면에서 보면 임란을 전후로 해서 양분되는 경향을 보이는데 임진년 전후에 나타난 호수의 시는 호기와 의기가 한 줄기를 이루고, 임란 이후는 유자로서의 삶인 도학적 기풍, 자연과의 화락이 주를 이룬다. 또한 인간적 정리, 삶의 관조 등이 시적 경향의 특징으로 나타난다. 젊은 시절의 의기와 호기가 그대로 투영되었다는 점과 노경의 삶 속에서 묻어나는 인간적 정조와 선비적 아취가 호수 시의 한 특징이 될 수 있다. 임진년을 전후한 시에는 현실인식의 바탕 위에서 충정과 의리를 강조하고 있다. 위난의 시기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며,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늘 자각했던 것이다. =정병호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원장 “백암 정의번의 생애와 풍모” 백암 정의번은 호수의 장남이다. 호수선생실기에 수록된 <백암공사적>자료를 통해 그의 생애를 보면 성질은 어질었고 어려서부터 예의와 사양의 법도를 알아 어른들을 섬겼으며 종족과 이웃은 물론 집안의 종들에게까지 친애를 베풀었다. 어린 나이에 이미 사람의 도리를 알고 실천했던 것이다. 지극한 정성으로 부모를 모셨고, 昏定晨省을 한결같이 실천했다. 가정에서 수학했는데 수년 만에 학식이 크게 열려 무불통지의 경지에 이르렀다. 항상 홀로 조그만 서제에 거처하면서 밤낮으로 부지런히 독서하였다. 관례를 올리고 영월 辛氏 덕린의 딸에게 장가들어 한결같이 예의를 갖추어 부인을 공경하였다. 부인 역시 온아하고 단정한 성정과 부덕을 갖추었다. 25세에 향시에 응시해 장원으로 선발되고, 26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러나 부귀공명과 영달에는 관심이 없었다. 인품이 여락하고 평소 초세의 志趣가 있었다. 吟風弄月에 혹 산수의 그윽하고 고요한 곳을 만나면 문득 기뻐하며 돌아오는 것을 잊어버린 채 시를 읊으며 즐거워하였다. 그의 나이 33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였다. 그해 5월 초에 부친의 명을 받들어 창의하여 의병 900여명을 모집하였다. 5월 15일에 부친과 함께 박연 전투에 참전하여 왜적을 크게 격파했고, 7월 27일에 부친과 함께 영천성 전투에 참전하여 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8월 21일 제1차 경주성 전투에 참전해 용맹스럽게 싸우던 중 위기에 처한 부친을 구한 뒤 장렬히 순국하였다. 이때 시신이 발견되지 않자 부친은 주변의 친지들이 보내준 만사나 애사를 모아 관에 넣어 詩塚이라는 무덤을 조성하였다. 1592년에 호조정랑, 1732년에 좌승지에 증직되었다. 그의 좌승지에 증직의 근거로 ‘殉國死親’이 명시되어 있다. 殉國은 충을, 死親은 효를 의미한다. 또 지금 백암의 시문이 남아 있지 않아 문인으로서의 풍모를 자세히 밝히기는 어렵지만 자료를 찾아보면 시문에 상당한 성취를 이룬 文人으로 보인다. 修己治人의 삶에 충실했던 백암을 통해 진정한 선비의 풍모를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