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스크를 벗었다. 속까지 시원하다. 지난 2년이 넘는 세월 동안 모든 것이 멈춰선 느낌이었다. 엄청난 시련을 겪은 사람들 표정이 제 모습을 찾아가는 것처럼 우리 사회도 빠르게 정상화하는 게 최우선이다.비정상의 정상화는 건드리면 아픔이 따르지만 언제까지나 덮어두고 못본척 하는 것보다는 낫다. 지금 비록 아플지언정 미래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것이 생산적이고 건설적이기 때문이다. 가래로 막기보다 호미로 막자는 말이다. 최근의 논쟁중에 부모찬스가 핫이슈다. 조국사태때 한차례 몸살을 앓더니 새정부 들면서 장관 후보자들 인사청문회에 다시 등장했다. 진영이 갈라져 서로 헐뜯는 모양새가 옳고 그름을 떠나 결국은 개그처럼 돼간다. 미래지향도 없다. 공정과 상식의 잣대는 고무줄처럼 ‘그때 그때 달라요’다. 국민들은 혼란스러워 어느 장단에 춤을 춰야 할지 대략난감이다. 발단은 최순실씨의 딸 때부터였다. 불법적 특혜로 대학에 입학한 그는 “돈도 실력이다. 나처럼 될수 없으면 돈없는 너희 부모를 원망해라”라는 글로 많은 국민들의 가슴을 허탈하게 했고, 마침내 촛불을 들게 만들었다. ‘나라를 나라답게’ 만들겠다던 문재인 정부는 이른바 ‘조국 인사청문회’때 또 딸문제로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고 흔들렸다. 국민적 공분은 그때마다 나라를 뒤흔든다. ‘공정과 상식’을 내걸고 출범한 윤석열 정부는 과연 어떤가. 새 정부 장관 후보자를 둘러싼 의혹의 핵심에도 역시 ‘부모 찬스’가 떡하니 버티고 있다. 보수나 진보를 떠나 기득권층의 삶에는 일반 국민들과 다른 무엇인가가 있는게 분명하다. 기실 지금까지 보수쪽이 그러면 약간의 너그러움(?)이 있었으나 진보쪽에는 날카롭고 예리했다. 그래서 그런지 이들이 반격에 나선다. ‘돈도 실력’이라는 말처럼 자신의 능력은 돌아보지 않은 채 왜 이유없이 부모 찬스만 비난하고 나서느냐고 반격했다. 재력있는 부모가 자식의 가능성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뭐가 잘못된 거냐고 되묻는다. 부자 부모가 자식의 꿈에 지원하는 것조차 막는다면 건강한 사회가 아니라며. 그렇게 이야기하는 것이 오히려 분노정치거나 포퓰리즘이라 말한다. 불공정의 역습이라면 지나칠까.하지만 이 사회를 구성하는 사람중에 사회지도층은 두께가 얇다. 특히나 인구절벽을 이야기 하는 마당에 기득권을 뺀 나머지 젊은이들이 이런 불공정을 몸으로 느낀다면 그 상대적 박탈감은 헤아릴 수 없을 것이고 두려움의 실체도 그려질 것은 뻔하다. 정당한 경쟁 대신에 각종 찬스가 능력이 되고, 그런 가짜 능력으로 출세하고 부를 누리는 사람이 있는데 공정을 입에 담기는 아마도 어려울 것 같다. 이런 현실이 자신들에게 엄격한 잣대라고 느낀 사람이라면 자녀 가질 생각을 할지도 의문이다. 우리 사회 금수저와 흙수저로 상징되는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고착화하는 것만은 우리 모두가 경계해야 할 일이다. 지나친 능력주의가 대한민국 사회를 떠받치는 소중한 약속인 공정을 흔들기 때문이다. 수많은 불법과 반칙 중에 왜 유독 부모 찬스는 민감한가. 답이 될지 모르지만 미국의 미식축구 감독 배리 스위처가 남겼다는 비유,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났으면서도 자기 스스로 3루타를 친 줄 안다”는 말은 참 예리하다. ‘부모 찬스’라는 사다리를 가진 사람이 있는 한 더이상 개천에서 용나기를 바라는 것은 난망이다. 불법이나 탈법이 아니라고 국민의 눈높이에 어긋나는 것도 옳지 못하고, 부자 부모들끼리 품앗이 하듯 자기 자식들만 챙기며 없는 사람을 혐오하는 것도 문제지만, 부모가 돈이 없다고 꿈꾸는 것도 금지된 사회 역시 미래가 없다. 우선 사람을 키우는 교육 현장에서 문제점이 있음을 알고 제대로 된 처방이 나오면 좋겠고, 이런 공동체 위기 문제를 건강한 논쟁을 통해 미래를 밝히는 좋은 기회로 삼으면 좋겠다. 변증법적 이야기로 ‘정’과 ‘반’이 버무려져 ‘합’이 도출되는 과정을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