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직(蔭職)신치관(辛致寬)문희공 석조의 뒤. 현종 신해 무과. 벼슬은 영장. 일찍이 금 직전무에 실화(失火)로 불이 나 뜨거 운 열기가 하늘까지 넘쳐나 사람들 이 감히 가까이 가지 못했다. (이에) 치관이 큰 대나무 장대로 옷과 걸레 를 매달아 물에 적셔 몸을 떨쳐 물을 뿌려 여러 위사(衛士)들을 탈출 시켰 다. 숙종께서 높은 다락에서 이를 보 시고 경이(驚異)롭다 하시고 두텁게 상사(賞賜)를 더하라 명하시고 단계 를 뛰어 넘어 발탁하셨다.신치정(辛致鼎)문희공 석조의 뒤. 현종 조 무과. 벼슬은 훈련봉사정시창(鄭時昌)신해년 무과. 벼슬은 만호정시심(鄭時諶)현감 호례의 아들. 풍의 (風儀)가 좋고 아름다운 수염은 무릎 을 지났다. 병진년 무과. 벼슬이 호군 전이돈(全爾墩) 병사 삼달의 손자. 숙종 병진년 무과. 벼슬은 만호 임준(林濬) 나주인. 절도사 진의 뒤. 숙 종조 벼슬은 승지정석조(鄭碩祖)현감 호례의 손자. 병진 년 무과. 벼슬은 선전전우성(全宇成)현감 삼익의 손자. 영종 병자년 무과에 오름. 감찰을 역임하 고 제주 판관이 됨. 임금께서 묻기를 ‘무엇으로 백성을 다스리느냐?’(에 대하여)대답하기를 ‘먼저 백성을 사 랑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조학신(曺學臣)치재 선적의 아들. 기우 (器宇)가 크고 체력이 따를자가 없었 다. 영종 기묘년 재상이 (학신을)장수 (의 재목으로)천거하자 바로 명하여 인견(引見)하시고 청룡도를 하사하여 시험하여 사용하도록 하시고 임금께 서 말씀하시기를 ‘장하도다. 이 사람 이여’(하시고)사복내승으로 제수하시 고 특별히 내시사제(內試賜第)를 설 치하고 이로부터 은혜가 비상(非常) 하였다. 안으로는 현요(顯要)92)를 역 임하고 밖으로는 주목(州牧)을 맡아 이르는 곳마다 모두 정치적인 업적이 있었다. 계급을 건너 뛰어 별군직을 제수하고 병마절도사를 역임함은 모 두 특별한 왕명에서 나온 것이다. 정 종은 일찍이 교시를 내려 말씀하기를 ‘나의 뜻을 능히 체득(體得)하여 근심 을 나눔은 진실로 극히 가상(嘉尙)하 노라’하시고 규장각지 대전통편 별군 직제명첩 각1부와 숙마(熟馬)와 비단 안장 등의 물건을 내사(內賜)하셨다. 죽음에 이르러 부의(賻儀)와 제문(祭 文)을 내리라 명하셨다.박수일(朴守逸)세심당 증효의 현손. 호 는 오강. 벼슬은 공주영장서우정(徐禹正)괴헌 경택의 뒤. 무과 조병규(曺炳奎) 병사 학신의 아들. 무 과. 벼슬은 선전. 진해현감에 이르렀 다 통정대부로 승차조병주(曺炳周)병사 학신의 아들. 무 과. 벼슬은 오위장조경하(曺慶夏)지산 호익의 뒤. 정종 을묘년 무과. 벼슬은 현감. 통정대부 로 승차권사억(權師億)충의공 응수의 뒤. 기 묘년 무과. 벼슬은 토포사권이중(權以中)참판 응심의 뒤. 순조 조 갑술년 무과. 벼슬은 양구현감서재용(徐載瑢)괴헌 경택의 뒤. 무과. 벼슬은 부호군권호병(權虎秉)충의공 응수의 뒤. 무 과. 벼슬은 군수권재병(權載秉)충의공 응수의 뒤. 순 조 병자년 무과. 신도첨사를 역임하 고 장기현감이 됨. 공평하고 첨렴하 며 정직하여 백성들과 아전들이 두 려워 복종하였다.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는 행장 속은 쓸쓸하였으니 금학(琴鶴)의 풍도가 있었다. 언제나 독서로서 몸을 삼가고 밭에 힘쓰고 집안을 다스리며 자손들을 가르치고 훈계하였다.권규병(權奎秉) 충의공 응수의 뒤. 순 조 신사년 무과. 벼슬은 도총도사와 초계군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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