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이시복(李時復) 헌납 사징의 뒤. 호는 신재. 어려서부터 성품이 지극하여 양친에 부지런하였다. 동지들과 같이 산방(山房)에서 독서하는데 소학(小學)의 문왕이 하루 세 번 문안하였다는 장구에 이르러 문득 책을 덮고 말하기를 ‘옛 성인은 하루에 오히려 세 번을 문안하였다는데  나는 능히 한달에 세 번 문안치 못하니 가히 자식의 도리라 하겠는가?’(하고) 그날로 집으로 돌아오자 아버지가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이는 우리 집의 소학아(小學兒)로구나’(라 하였다).  성장해서는 언제나 말하기를 ‘사람의 자식이 과거시험에 응함은 장차 어버이를 영화롭게 하고자 함인데, 응시하여 등제치 못함은 바로 어버이를 속이는 것 이리’하고는 드디어 과거 공부는 접고 성현의 격언과 삼강실록을 베껴 언제나 눈에 붙였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드리운 것이 세 번에 어머니가 회생하였다. 하루 (어머니가)돌아가자 성복(成服)하고 너무 슬퍼하다 병이 되어 죽었다. 임오년에 사실이 알려져 동몽교관으로 추증되었다. 박려(朴礪) 장악정 영손의 증손. 효행으로 조정에 알려져 선릉참봉으로 제수 됨. 이원석(李元錫) 첨정 덕수의 뒤. 호는 덕암. 효우(孝友)는 하늘에서 나왔고 어버이 모심에 정성을 다하였다.  어버이가 이질병에 걸려 토끼고기와 살아 있는 물고기를 원하자 이에 두 가지 물건을 드렸더니 바로 나아 사람들은 효감(孝感)이라 일컬었다. 포상하고 칭양한 글(題)이 있으며, 일찍이 스스로를 경계하는 열가지 경계를 지었다(自箴十警) 서리상(徐履祥) 판관 호의 뒤.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기질이 있고 정성과 효도가 하늘에서 나와 여러번 만물(物類)을 감동시켰다.  어버이 초상에 여묘살이를 하는데 하루는 호랑이가 와서 소란스럽게 하기에 집에 돌아와 보니 빈소에 막 불이 붙었기에 불을 끌 수가 있었다. 고을과 이웃에서 도백(道伯)에게 정장(呈狀)하였다. 정수강(鄭壽崗) 정랑 석남의 현손. 호는 남호. 태어나면서 빼어나고 기이하며 두텁게 배워 문장에 능했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어릴 때부터 일찍이 어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하나의 맛있는 것을 얻더라도 감히 먼저 입에 넣지 않으며 아침저녁의 음식드림은 반드시 친히 삶고 익혔다.  아버지가 일찍이 병을 만나 두 달이 지나도록 옷과 띠를 풀지 않고 매일 한밤에 하늘에다 (아버지의 병 나음을)빌었다. 병이 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드리워 명이 끊어졌다 다시 살아났다.  그 후 아버지가 명을 다 하고 죽자 애훼(哀毁)함이 예법을 넘었고 이미 장례를 치루고 여묘살이 3년을 하여 사람들은 그 골짜기를 정씨 효자가 시묘하던 골짝이라 말했다.  불행히 어머니보다 먼저 죽으니 임종에 어머니에게 울면서 고하기를 ‘죽고 삶이 천명에 달렸거늘 원컨대(어머니께서는 저의 죽음에)가슴아파하거나 그리워하지 마세요’(라 하였다)나이 많은 농부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차마 농부가(農歌)를 부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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