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 신이행(申以) 아주인. 나재 열도의 증손. 호는 창암. 나이 겨우9세에 혼정신성(昏定晨省)과 공양(供養)의 절도를 배우지 않고도 능히 하였다. 성장해서는 어머니가 묵은 병이 있어 옷은 띠를 풀지 않고 입에는 이(齒)를 보이지 않았다. 언제나 똥의 쓰고 단 것을 맛보았다. 어머니가 붕어고기를 먹고 싶어하는데 때는 개울과 못이 가물어서 말라버려 고기를 구하려 해도 구할 수가 없어 슬피 울면서 장차 집으로 돌아오려는데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내려 한자나 되는 고기가 앞에 떨어지기에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에게 드렸더니 어머니의 병이 드디어 나아 사람들은 효감(孝感)이라 일컬었다. 초상에 이르러 묘소 아래에다 여막을 지었는데 사람들은 시묘(侍墓)하던 골짜기라 불렀다. 구덕징(具德徵) 능주인. 문절공 홍의 뒤. 어버이 모심에 정성과 효를 다하였다. 집안이 매우 가난하여 부모님 드릴 양식이 부족할까 두려워 비록 매우 춥거나 아무리 뜨거워도 자리를 짜서 시장에 내다 팔아 맛있는 음식(甘旨)를 끊지 않았다. 어머니 병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먹여(연명함으로써) 고을 사람들이 그 효성을 칭송하였다 노수갑(盧壽甲) 소암 수의 뒤. 호는 죽와.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며 나이14세에 어머니가 병이나 거의 고치기가 어려웠는데 단지(斷指)하여 피를 드리워 효험을 보았으며, 거상(居喪)에 애훼(哀毁)함이 예법을 넘었다 조태한(趙泰漢) 훈도 종대의 증손. 호는 낙재. 영조 무신년에 창의하고 효행이 있다. 나이 60에 어버이의 초상을 만나 여묘살이 3년을 하였고, 유고(遺稿)가 있다  양실근(楊實根) 감사 배의 뒤. 어머니가 이질병에 걸려 몇 달이 지나 거의 죽음에 이르자 단지(斷指)하에 입에다 (피를)적셔 소생하였다. 이 사실이 알려져 동몽교관으로 추증되고 정려(旌閭)를 명하였다. 김도원(金道源) 판서 장미의 뒤. 아우인 도환과 도익으로 부모를 효성으로 봉양하였다. 어머니 전씨가 사람들이 몰아서 죽이자 형제 세사람이 손수 칼을 가지고 복수하고, 인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영종 신축년에 이 사실이 계장(啓狀)으로 보고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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