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孝) 황보성(皇甫星) 충정공 인의 뒤. 천성으로 효성이 지극하여 11세에 아버지 초상을 치룸을 한결같이 성인(成人)과도 같았다. 나이 50를 넘김에도 일찍이 어머니의 곁을 떠나지 않고 단(壇)을 집 뒤에다 쌓고 언제나 어머니를 위해 축수(祝壽)했다. 겨울에 어머니가 살아 있는 고사리(生蕨)를 생각하니 성은 지름길로 아버지의 묘소를 찾아가 슬피 부르짖으면서 속으로 기도를 하자 갑자기 살아 있는 고사리가 흙을 머리에 이고 싹을 내 놓은 것이 있었다. 어머니가 병이 나자 손가락을 찧어 피를 드리워 3일을 연명하고 죽으니 슬픔과 예를 무두 갖추었다. 새벽과 저녁에 묘소를 찾아 절을 드리는데 언제나 한 마리의 호랑이가 있어 성의 뒤를 따라다녔다. 일찍이 한권의 책을 지어 그것으로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자손들을 가르치는 법도로 삼았다. 을유년에 도백(道伯)이 조정에 알려 동몽교관으로 추증됨 황재천(黃載天) 평해인. 평해군 희석의 뒤. 태어나면서 효성이 두터워 10세에 어머니가 수종다리 병이 나 여러달 침상에 누웠는데 (대천이 고름을 입으로)빨아서 완치되었다. 성장해서는 새벽과 저녁의 보살핌과 맛있는 음식의 공양을 지극하지 않음이 없어 사림들이 정장(呈狀)하였다. 이 사실은 속수 삼강록에 실려 있다 김도환(金道煥) 도원의 아우. 형 도원과 아우인 도익과 같이 부모를 효도로 봉양하였다. 어머니 전씨가 사람들이 몰아서 죽이자 형제 세사람이 손수 칼을 가지고 복수하고, 인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영종 신축년에 이 사실이 계장(啓狀)으로 보고됨 김도익(金道益) 도원의 아우. 효성으로 부ㅜ모를 봉양함. 어머니가 사람들에게 몰려 죽자 형인 도원 도환과 같이 손수 칼을 가지고 복수하고, 인하여 여묘살이 3년을 하였다. 영종 신축년에 이 사실이 계장(啓狀)으로 보고됨 이억만(李億萬) 익재 제현의 뒤. 집안은 가난하고 일찍 아버지를 여읨. 어머니 받듦에 효성이 지극하여 나이 17세에 어머니가 학질(?疾)에 걸려 몇 해가 지나도록 낫지 않아 넓적다리 살을 베어 그것으로 (음식을 만들어)드렸더니 병이 바로 나았다. 어머니가 늙어 병이나 장차 죽음에 단지(斷指)하여 피를 드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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